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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모덩 Jan 31. 2019

스스로의 연약함과 맞닥뜨린 당신

못 본 척하고 고개를 돌릴 것인가, 담담히 마주하고 받아들일 것인가

지난 주 어느 날 있었던 일


지난주 어느 날, 한 수업에서 아동기에 겪을 수 있는 외상 경험에 대해 강의를 하고 있었다. 학술적 용어로는 '아동기 역경 경험 (Adverse Childhood Experiences, ACEs)' 라는 주제였는데, 말하자면 아동이 성장 과정 및 환경에서 겪을 수 있는 여러 가지 어려움을 통칭하는 말이다. 예를 들자면 부모의 이혼, 가정폭력, 정서적 또는 신체적 학대, 부모의 투옥, 인종차별 등이 해당된다.

그렇게 나름대로 준비한 내용을 열심히 전달하고 있었는데, 어라, 가장 앞줄에 앉아 수업을 듣던 한 학생이 급한 일이라도 생긴 듯 갑자기 부리나케 짐을 챙겨 강의실을 뛰쳐나가는 게 아닌가. 이게 무슨 일이지. 그 학생의 갑작스러운 행동에 순간 이목이 집중되었고, 몇몇 학생들 역시 놀란 표정이었다. 한낱 박사과정생이자 초짜 강사인 나 역시 순간적으로 얼어붙고 말았다. 찰나의 시간에 여러 생각이 머리를 스쳤다.


'내 수업이 그렇게 노잼이었나.'

'부족한 내 영어가 답답했을까, 아니면 내가 아시아인 남자라서?'

'그냥 뭔가 급하고 바쁜 일이 있었을지도 몰라.'


흔들린 유리멘탈, 학생의 자초지종


찍-. 유리멘탈 귀퉁이에 금이 갔다. 말도 점점 횡설수설하기 시작하고 영어도 잘 나오지 않았다. 몇몇 학생들은 내 표정이 긴장감으로 굳어졌음을 눈치챈 듯했다. 금 간 멘탈이 쩌-억 갈라지려고 할 찰나, 겨우 정신을 차리고 하던 수업을 얼렁뚱땅 마무리했다. 유난히 고단하고 길었던 세 시간이 지나갔고, 그 날 늦은 밤, 한 통의 이메일을 받았다. 수업 중에 교실을 뛰쳐나갔던 그 학생이었다. 그는 나에게 사과를 하고 있었다. 


사정인즉슨 이랬다. 그 학생은 원래는 그렇게 수업 중에 강의실을 나갈 생각도 계획도 전혀 없었다고 했다. 다만 최근에 가족과 관련된 어떤 민감한 사안을 겪었고, 그런 그에게는 그 날의 수업내용을 소화하기가 너무 버거웠던 모양이었다. 그래서 차라리 수업을 포기하고 교실에서 나가는 게 낫겠다는 생각을 했다며 진심 어린 사과를 건넸다. 


미안했다. 나 또한 정성스레 그에 답하는 이메일을 썼다. 사과는 당신이 아니라 내가 해야겠다고. 오늘의 강의 내용이 당신에게 미칠 수 있는 영향에 대해 미리 공지해주지 못해 미안하다고. 상담자로서 성장함에 있어서 과거의 일들이 나에게 어떻게 영향을 미치고 있는지를 인식해 나가는 것은 정말 중요한 성장과정이라고. 무엇보다도, 스스로를 잘 돌보고 도움이 필요하다면 언제든 손을 내밀어 달라고. 그렇게 답을 했다. 다행히 그는 나의 얘기가 큰 힘이 되고 힘이 돼 줘서 고맙다는 인사를 되돌려 주었다. 


버너러빌리티, 연약해질 수 있는 용기


내가 공부하는 이 전공분야에서는 '버너러빌리티 (vulnerability)' 에 대해 이야기를 참 많이들 한다. 2011년 1월에 Brene Brown이 TED 무대에서 강연을 하면서 대중에게 널리 알려진 내용이기도 하다. 우리나라 사전에서는 단순하게 '취약성' 또는 '약점' 정도로 번역이 되고 있다. 여기에 살을 좀 덧붙여, 나는 '연약해질 수 있는 용기'라고 이름 붙이고 싶다. 나는 이 '연약해질 수 있는 용기'야말로 상담자로서뿐 아니라 삶의 여정을 걸어 나가는 모든 사람들에게, 또 우리가 맺는 관계에서 필수적인 요소이자 자질이라고 믿는다. 


물론 이 용기를 내기란 쉽지 않다. 그 학생이 그 날에 지난날의 아픔을 마주하고 견뎌내야 했던 것처럼, 나 역시 종종 나의 연약함을 마주하는 순간에 놓인다. 맘에 들지도 않는 내 모습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건 정말 어려운 일이다. 나의 연약함을 바라보는 것, 마주하는 것만으로도 고통이 뒤따른다. 때로는 너무 보기 싫어서 눈을 질끈 감아버리기도 하고, 또 때로는 그 벽이 너무 높아 보여서 넘어갈 엄두도 못 낸 채 그 자리에 주저앉고 싶을 때도 있다. 


연약함을 마주할 때 우리는 성장한다


어린 시절 겪었던 상처와 역경은 그 학생뿐 아니라 나의 이야기, 그리고 우리 모두의 이야기이기도 하다. 우리의 연약함은 삶 도처에 자리 잡아 있다. 떠올리고 싶지 않은 과거의 사건, 부족한 나의 역량 또는 인품, 누군가에게 상처를 주거나 받은 일, 지우고 싶은 흑역사... 그 날 학생들 앞에서 벌벌 떨었던 강사로서, 가끔 홧김에 화를 내버리는 한 아이의 부모로서, 상담실 안에서 방향을 잃은 상담자로서, 이웃을 사랑하라는 말씀에 반하여 나를 사랑하기 급급한 종교인으로서, 나는 어쩌면 이리도 부족하고 연약한 한 인간인가. 


그러나 어찌하리. 지나간 과거의 일도, 못난 나의 모습도, 모두 '나'라는 존재의 일부인 걸. 분명한 사실은, 나의 연약함을 마주하고 포용할 때, 우리는 나뿐 아니라 다른 사람의 연약함도 담아줄 수 있는 사람으로 조금씩, 조금씩 성장할 수 있다는 점이다. '최고'이거나 '완벽한' 내가 아니어도 괜찮다. 우리의 연약함을 똑바로 마주하고 받아들일 때, 비로소 '충분히 괜찮은 나'를 발견할 수 있다. 그렇기에, 오늘 또 내일 더 나은 사람으로 성장하고자 하는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삶의 태도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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