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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모덩 Feb 21. 2019

당신을 들으러 가는 길

상담에서 '듣는다'는 것의 의미

눈이 내렸다.


알람을 맞춘 시간보다도 꼬박 한 시간을 더 자고 일어난 아침. 소리도 없이 눈이 온 세상을 덮었다. 학교가 또 닫았다. 올 겨울만 벌써 네번째. 학교가 닫는다는 건 수업과 미팅을 비롯한 모든 학교일정이 취소되었다는 뜻이다. 오예. 나의 지도교수님은 이 곳에서 지낸 지난 16년 동안 올 겨울만큼 이렇게 학교가 많이 닫은 적이 없다고 말했다. 


새하얀 세상. 창 밖 너머 눈 내리는 풍경을 바라보는 내 마음이 고요하다. 내가 상담실에서 만났던 그들은 알까. 이렇게 마음이 고요해질 때면 가끔 당신들이 내 마음에 어른거린다는 걸. 그 때 그 고민은 잘 해결된건지. 내가 무언가 달리 했더라면 더 도움이 되진 않았을런지. 혹 내가 충분히 들어주지 못했던 것은 아닌지. 궁금함과 아쉬움 사이의 그 어딘가를 내 마음이 배회한다.

 




듣다 [듣따]  

[동사] 

1. 사람이나 동물이 소리를 감각 기관을 통해 알아차리다
2. 다른 사람의 말이나 소리에 스스로 귀 기울이다


듣는다는 건 '알아차리는 것'이고, 또 나의 몸과 마음을 상대에게 '기울이는 것'이다. 상담이라는 학문에서 하는 많은 일들이 결국 더 잘 듣는 상담자가 되기 위함이라는 생각을 한다. 내 앞에 앉은 그 사람을 더 잘 들어내기 위해서 내가 어떤 사람인지도 탐구하고, 상담 이론을 공부하여 나에게 잘 맞는 이론을 택하고, 또 수퍼비전도 받는 것이다. 


상담에서 듣는 행위는 '적극적 경청' 또는 '공감적 경청'이라는 말로 정립되어 있다. 말 그대로 적극적이고 공감적인 자세로 경청하는 일이다.얼굴의 표정과 몸의 자세, 손짓 발짓까지 총동원하여 온전히 상대방에게 집중하고, 상대를 이해하고자 하고, 들은 바를 잘 정돈하여 기억하는 일. 내담자중심 상담이론의 창시자인 칼 로저스는 이러한 '들음'을 통해서 인간은 변화로 나아간다고 했다. 스스로에 대한 시선 뿐 아니라 다른 사람을 대하는 태도, 나아가 삶의 가치관과 세계관을 변화시킬 수 있는 가장 중요한 요소라고 믿었던 것이다.


여기에서 듣는다는 것은 수단이 아니라 목적이다. 적절한 반응을 하기 위해서 듣는 것이 아니다. 반박이나 평가, 또는 판단을 하기 위해 듣는 것은 더욱이 아니다. 듣는 일 자체가 목적이다. 로저스의 말처럼 듣는 일은 한 인간이 자랄 수 있도록 물을 주는 일이다. 누군가로부터 온전히 들어지는 경험을 할 때 인간은 꽃을 피운다. 구부정했던 어깨가 조금씩 펴지고, 숙였던 고개가 조금씩 들어지고, 잿빛 얼굴에 생기가 돌고, 눈망울이 반짝이기 시작한다. 





듣기 위해서는 참 많은 말들을 내뱉지 못하고 삼켜야만 한다. 그래서 들음에는 인내가 필요하다. 들음은 한 번의 행위가 아니라 지속되는 '과정'이다. 그뿐일까. 듣는다는 것은 알아차리고 나라는 존재를 상대에게 기울이는 것이기에, 귀와 청각만으로 하는 일이 아닌 온 몸과 온 감각을 동원하여 하는 일이다. 나에게 듣는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오늘은 어떤 이야기를 듣게 될까. 상상하고, 기대하고, 설레하는 마음.

문을 열고 들어오는 그 순간의 표정을 보며 오늘의 마음이 어떨지 살피는 것. 

배배 꼬이는 손과 다리가 내뱉는 말이 무엇인지 귀를 기울이는 것.

그렇게 온 몸의 감각을 활짝 열어 작은 떨림과 움직임에도 반응하는 것. 

꾸민 내 모습이 아니라 진짜의 내 모습으로 존재하는 것. 

온전히 상대에게 집중할 때 자연스레 몸이 기울듯 나의 마음을 함께 그에게로 기울이는 것.

마음 속의 번잡함과 판단적 태도를 내려두고 상대를 담을 수 있도록 내어둔 내 마음 한 켠의 공간. 

때로는 "너라는 사람이 궁금해. 너의 얘기를 정말 듣고 싶어."라는 노골적인 초대. 

말할까 말까 망설이는 그 주저함의 순간에, 재촉이나 독려 없이 잠시 머무는 기다림. 

침묵이 필요한 순간을 존중하고 그 고요한 적막의 시간을 함께하는 것. 

눈물을 흘리는 상대의 눈을 바라보며 다른 어떤 말에 앞서 나의 눈도 슬며시 촉촉해지는 것. 

모든 대화를 마치고 난 뒤 다시 한 번 그를 떠올리며 그의 말을 곱씹는 일. 






상담시간이 다가온다. 

지난 세션의 기록을 확인하며 메모지와 펜을 챙긴다.


오늘은 조금 더 잘 들어보리라 다짐하며,

마음을 다시 한 번 다잡고, 

떼어보는 발걸음.


소복소복, 눈 덮인 길.

누구의 발자국도 찍히지 않은 곳을 걸으러, 

누구의 귀에도 닿지 않은 이야기를 들으러 나서는 길.

 

당신을 들으러 가는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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