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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모덩 Sep 04. 2019

아동기 역경 경험 점수 '9점'짜리 아이를 그려보다

나는 오늘 어떻게 박사논문 주제를 정하게 되었나

'나만의 주제'를 찾아서


박사과정 3년 차의 막이 열리고 나서 어느덧 일주일이 훌러덩 지나갔다. 내가 벌써 3년 차라니. 지난 2년 동안 대단한 성취를 이룬 건 없지만 그래도 이제는 이 생활에 어느 정도 적응을 한 기분이다. 들어야 할 수업들도 어느 정도 들었고, 아직 출판물은 미흡하지만 연구도 계속해 나가고 있고, 역시 부족하지만 강의 경험도 계속해서 쌓아나가고 있다. 이번 학기부터는 우리 단과대 안의 부속 기관인 Herr Clinic에서 인턴을 시작하게 돼서 이제 상담과 슈퍼비전도 본격적으로 해나갈 생각이다.


이런 와중에 요새 내 삶 한가운데 놓인 고민은 바로 '나의 주제'에 대한 것이다. 나의 학문적 정체성을 어디에 둘 것이며, 그 중심이 될 나의 박사학위 논문의 주제는 무엇으로 할 것인가. 다시 말해, 나만의 것, 이 동네에서 그래도 이거 하나만큼은 내가 제일 잘 아는 것, 이것에 대해서라면 주변 사람들이 내게 물어올 만한 것. 그게 뭘까.


이걸 찾는 게 참 쉽지 않다. 더군다나 나는 최근에 연구에 있어서 방향을 조금 틀었다. 이제까지는 인성교육, 학교폭력 등 학교상담 (school counseling) 쪽 주제에서 공부와 연구를 주로 해 왔다. 지금은 아동기 역경 경험 (adverse childhood experience), 아동기 외상 경험 (childhood trauma), 트라우마인폼드케어 (trauma-informed care) 등 좀 더 정신건강상담 (clinical mental health counseling) 영역에 가까운 주제들을 살펴보고 있다. 이렇게 방향을 트는 과정에 있다 보니 고민이 더욱 많아질 수밖에.



아동기 역경 경험에 대한 관심


이렇게 고민이 켜켜이 쌓이는 중에도 최근 몇 주간은 실마리가 조금씩 풀리는 기분이었다. 최근 일 년 동안 관심의 불씨가 꺼지지 않는 연구주제가 있었고 최근 이에 대해 계속 마음이 더 강하게 기울었기 때문이다. 그 주제는 바로 아동기 역경 경험. 아동기 역경 경험은 아동기에 겪을 수 있는 다양한 역경 경험을 통칭하는 말인데, 주로 신체적, 정서적, 성적 학대 및 방임, 그리고 부모의 이혼, 가족 구성원의 감옥 수감과 같은 가정 내의 여러 역경을 포함한다. 


얼마 전부터는 이 주제에 대한 연구를 위해 National Survey of Children Health (NSCH)라는 데이터를 사용하여 학회에서 발표도 하고, 논문도 작성하고 있다. 우리나라 말로 풀자면 '아동건강실태조사' 정도가 되겠다. 미국 전역에서 실시한 조사이고 표본 크기도 아동 및 청소년 5만 명이 넘는 제법 큰 규모의 데이터다. 경제적 어려움, 부모의 이혼 또는 죽음, 부모의 투옥, 가정폭력, 이웃폭력, 가족 구성원 중 심각한 정신건강 상의 어려움이 있는 경우, 가족 구성원의 알코올 및 약물 문제, 마지막으로 인종차별 경험까지 9개의 아동기 역경 경험이 설문 안에 포함되어 있다. 


데이터에 따르면 아이들 중 약 4명 중 1명의 아이가 부모의 이혼을 경험하고 5명 중 1명은 가정 내에서 빈곤에 노출된다. 아이들 약 10명 중 1명은 가정 내에 알코올이나 약물 문제를 지닌 사람이 있다. 이모저모 데이터를 살펴보다가 문득 호기심이 일었다. 혹시, 정말 혹시라도 이 5만 명 이상의 아이들 중 9개의 역경 경험에 모두 'yes'라고 대답해야만 하는 아이들이 있을까. 



아동기 역경 경험 9점짜리 아이


왠지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부디 없었으면 하는 마음으로 통계분석을 실행했다. 결과는, 있었다. 9개의 역경 경험을 모두 경험한 아이는 총 4명이었다. 비율로 따지자면 5만 명 분의 4이니, 약 10,000분의 1, 즉 0.01% 정도의 비율이다. 짧고 무거운, 그르렁대는 신음에 가까운 탄식이 절로 나왔다. 나로서는 감히 상상할 수조차 없는 역경과 고난으로 점철된 삶, 그 삶에 던져진 아이들이 '총점 9점'이라는 데이터가 되어 내 눈 앞에 놓여 있다. 


어쩌면 상담자 그리고 양적연구자라는 두 가지 정체성을 동시에 유지하다 보니 생긴 습관 일지 모른다. 데이터를 마주할 때는 데이터 상 하나의 케이스일 뿐이지만 한 명의 실존하는 존재를 그려본다. 상담실에서 내담자를 마주할 때는 이 내담자의 호소문제와 증상과 기능 수준을 데이터로 치환하여 생각해 본다. 이 아동기 역경 경험 9점짜리 아이 4명을 데이터로 확인했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데이터 상으로는 그저 9점짜리에 불과할지 모르는 이 아이가 상담실에서 내 앞에 앉게 된다면 나는 어떤 이야기를 듣게 될까. 나는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상담이라는 건 내담자의 문제를 적극적으로 해결해준다기보다는 내담자와 더 나은 삶으로의 여정을 함께 걸어가는 것이라고들 얘기한다. 그럼에도, 압도적인 역경 경험들 속에서 삶을 이어온 아이 앞에서 내가 당최 무엇을 할 수 있나를 자꾸 되짚어 본다. 9개 항목에 모두 'yes'라고 답한 9점짜리 사례가 아니라, 역경으로 가득한 이 아이의 삶이, 매 순간이 어떠했을지를 감히 먼발치에서 짐작이나 해 보는 것이다. 



'숫자'가 아닌 '존재'를 만나러 가는 길


앞서 언급했듯이 이번 학기부터는 우리 단과대 부설기관인 Herr Clinic에서 인턴을 시작한다. 그런데 생각지도 않게 매주 1-2회 정도 우리 도시 내에 있는 한 차터 스쿨 (Charter school)* 에 가서 상담을 하게 되었다. 학교상담과 정신건강상담의 경계에 있고, 여전히 그 경계의 좁은 발치에 서 있길 원하는 나로서는 이보다 더 좋은 기회가 있으랴 싶었다. 


오늘은 학교 내의 학교상담사 및 특수교육 슈퍼바이저 등과 함께 첫 미팅을 하는 날이었다. 나는 아무쪼록 현장을 배우고 현장에 계신 분들의 필요를 조금이나마 채우고 싶은 바람이 있었기에, 내가 어떤 일을 하길 기대하시는지 물었다. 아, 이게 나의 운명일까. 학교의 스태프들은 입을 모아서 아이들이 얼마나 많은 트라우마와 역경 경험에 노출되어 있는지, 정서, 행동, 사회 발달에 어려움이 있는 그 아이들에게 어떠한 도움이 필요한지에 대해 열변을 쏟아냈다. 


요약하자면 나는 내가 속한 대학교 단과대의 클리닉에 인턴을 지원했는데, 지역 내 학교에서 인턴십 시간의 일부를 채우게 되었고, 그 첫 미팅에서 내가 요새 공부해오던 아동기 역경 및 외상 경험에 대한 개입의 필요성을 들었고, 당장 다음 주부터 그 아이들을 만나게 된 셈이다. 나는 오늘 일어난 이 일을, 내가 믿는 절대자께서 내게 주시는 선물이자 운명인 것으로 받아들이기로 했다. 내가 만나게 될 아이가 역경 경험 몇 점 짜리 아이인지는 이제 더 이상 중요하지 않다. 그 아이의 삶은 한 칸에 기록된 점수보다도 훨씬 더 많은 시련의 눈물자욱과 극복의 발자욱이 가득한 '이야기'일 테니까. 


오늘 첫 미팅을 마치고 나와서 찍은 학교의 정면사진. 이 곳에서 아이들을 만나 아이들과 함께 성장할 나를 기대하며.



*차터 스쿨: 차터 스쿨(Charter school)은 미국의 독특한 학교시스템 중 하나로, 공립학교이지만 자율적이고 독자적인 커리큘럼을 운영한다. 즉, 공적 자금으로 운영되지만 일반 공립학교와 달리 규제에 얽매이지 않고, 가정 및 지역사회와의 협력을 기반으로 인성교육, 창의교육, 다문화교육 등을 실험적으로 운영하는 경우가 많다. 현재 미국에는 약 7,000여개 이상의 차터 스쿨에서 약 320만 명의 학생들이 교육을 받고 있으며, 학교와 학생의 수는 계속 늘어나는 추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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