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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모덩 Oct 17. 2021

회색주의자로 살아가기

극단을 피하고 균형감을 가지는 일의 중요성

디지털 홍수와 집단 극화


정보가 넘쳐나는 시대다.  하루에 생산되는 정보의 양이 25억 기가바이트에 달한다고 하며, 세상에 존재하는 데이터의 90%는 불과 지난 10년 동안 생산된 것이라고 하니, 가히 디지털 홍수를 넘어 디지털 재앙이라 부를 만하다.  넘쳐나는 정보로 인해 개인은 다양한 시각을 반영하는 정보를 고루 습득하며 균형 있는 사고를 하게 되었을까?  사회의 면면들을 살펴보면 그렇지는 않은 것 같다.  많은 사람들이 극단주의적 사고를 하고 있음을 본다.  어떤 이들을 스스로 극단주의자이기를 자청하는 것처럼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이는 정보를 취사선택하기 때문이다.  개인의 기호, 사상, 신념, 주변 맥락에 따라 한 쪽으로 발을 담그면 그 이후부터는 극단으로 가속화된다.  위와 같은 사전 경험에 따라 또다시 자신의 기호와 신념에 맞는 매체를 택하고, 그런 관계들을 확장하기 때문이다.  이는 사실 새로운 현상도 아니다.  집단 극화다.  개인들이 집단을 이루며 자신의 주장에 더욱 적극적인 옹호를 보이게 되는 현상이다.  이제 이들은 페이스북에서도, 인스타에서도, 현실에서도 자신의 '입맛'에 맞는 정보만을 소비하고 그러한 관계망 안에서만 교류를 하면서 극단적인 신념을 확대 및 재생산한다.  




상담자가 바라보는 회색주의


한편 회색주의자는 여러 사안에 대해 사상이나 입장이 뚜렷하지 않은 사람을 일컫는다.  과거에는 회색'분자'라고도 쓰이며 부정적인 뉘앙스를 많이 가졌던 말이다.  흑과 백 어디에도 명확하게 서 있지 않은 채 회색으로 몸을 가리고 있는 박쥐, 또는 기회주의자.  또는 입장을 분명히 함에 따라오는 리스크를 지는 책임을 면피하고자 양비론을 펼치는 비겁한 자의 느낌이랄까.  어쨌든 극단주의적 사고에 동의하지 않고 또 스스로도 어느 한쪽의 극단에 치우치지 않고자 하는 나 같은 사람이야말로 회색주의자라 할 수 있겠다.  이런 회색주의, 정말 그저 비겁한 기회주의에 불과할까. 


하지만 상담을 업으로 삼는 나로서는 종종 이 모호함의 지대에 서기 위해 오히려 부단히 노력해야 할 필요성을 느낀다.  상담은 결국 다양한 사람을 만나고 그들의 편에 서서 이야기를 듣고 공감대는 형성하는 일이다.  특히 멜팅팟 ( = 용광로. 다양한 문화가 하나로 녹아든 미국 사회를 빗댄 말. 요새는 다양한 문화가 하나로 합쳐지는 것이 아니라 고유의 색을 유지하며 융합해야 한다는 뜻으로 샐러드 보울이라는 표현을 쓰기도 함) 이라고 불리는 미국 사회에서는 더욱 그렇다.  다양한 인종, 배경, 성 정체성, 정치적 신념 등을 지닌 사람들과 만나 그들과 상호작용을 해야 하는 일이다.  그렇기에 상담자로서 내담자를 온전히 듣기 위해서는 편견과 극단, 그리고 너무 강한 한쪽을 향한 신념은 지양해야 하는 일이라고 나는 믿는다. 




회색주의자가 되는 방법


균형감을 가지기 위해 내가 의도적으로 신경을 써서 하는 일 중 하나는 다양한 시각을 지닌 매체와 커뮤니티에 스스로를 노출시키는 것이다.  한 때 나는 매일 종이신문을 읽었던 적이 있다.  당시엔 언제나 메이저 일간지 중 보수매체로 분류되던 조선, 중앙, 동아신문과 진보매체로 분류되던 경향, 한겨레신문을 함께 읽었다.  '같은 사안에 대해 바라보는 '시선'과 '각도'에 따라 해석이 이렇게까지 전혀 다를 수 있구나' 라는 생각을 종종 하며 거기서 오는 재미를 느꼈던 것 같다.  사안을 바라보는 '시각'에 따라 전혀 다른 이야기가 풀어진다는 점은 내가 회색주의자가 되는 데에 좋은 양분이 되었다.  


이런 나의 경향은 지금도 마찬가지다.  이를테면 여전히 보수적인 언론으로 알려진 팍스뉴스와 진보적인 매체로 알려진 뉴욕타임즈의 뉴스를 함께 받아본다.  우경화된 인터넷 커뮤니티에 올라오는 정치 관련 글들도 읽어보고, 진보적인 인사들의 페이스북 글도 읽어본다.  페미니즘 인스타그램을 팔로워 하며 그들의 이야기를 듣고, 그와 반대 편에 서 있는 사람들의 이야기도 접해 본다.  청소년 청년 세대가 기성세대에 가지고 있는 불만에도 귀를 기울이고, 요새 젊은것들에 대한 아쉬움을 토로하는 기성세대의 이야기에도 귀를 기울여 보는 것이다.  사안에 대한 나의 입장을 세워나가기 전에 정말 온전히 그들의 입장에 빙의하여 듣게 되면, 사실 이해 못할 이야기가 잘 없다.  대부분의 경우 누구에게나 그렇게 믿고 생각하고 행동할만한 이유가 있는 법이다. 




삶이, 인간이 모호하기 때문이다


물론 한쪽에 치우치는 강한 신념을 가지는 일이 그르다고 말할 생각은 전혀 없다.  상담자로서도 마찬가지다.  상담자도 정치적 목적을 지닐 수 있으며 때로는 그래야만 한다.  일례로, 사회정의상담에서는 내담자들의 삶에 실제적인 변화를 가져다주기 위해서는 다른 무엇보다도 사회적 약자들일 경우가 많은 그들이 직면한 사회구조적인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고 말한다.  하지만 상담자는 다양한 목소리를 들어보고 그 어느 목소리에도 '그럴만한 이유가 있구나'의 자세를 진심으로 취할 수도 있어야 한다.  


개인이 암만 진실과 객관성을 추구해도 그 진실은 결국 '주관적 진실'에 머무르게 된다.  마치 판사가 흘러넘치는 정보와 문서의 바닷속에서 객관성을 지니고자 사력을 다하여도 결국 한 줌의 주관성이 개입되는 걸 온전히 막을 순 없듯이 말이다.  그렇기에 나는 우리 사회 전체에서, 그리고 개인 내적으로도 회색지대가 좀 더 늘어나도 좋겠다고 생각한다.  또 나는 이유와 목적이 분명한 회색도 하나의 분명한 목소리로 받아들여진다면 좋겠다는 생각을 한다.  무언가가 분명하게 떨어지지 않는 모호함에 좀 더 관대한 사회, 그리고 개인들이 되었으면 좋겠다는 바람을 가진다.  흑과 백 한쪽에 견고히 서기에는, 우리 삶 가운데 딱 깔-끔하게 떨어지지 않는 회색지대가 너무나 많다.  나의 필명처럼 인간은, 그리고 그 인간들이 만들어내는 우리네 삶은 온갖 모순으로 가득한 모순덩어리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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