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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모덩 Oct 20. 2021

상실과 애도에 대하여

친구를 하늘나라로 떠나보내며

정말 혹여라도 고인에게 누가 될까 하여 망설여졌던 글을 조심스레 써보려 한다.  불과 며칠 전, 한국에서 투병 중이던 친구가 끝내 하늘나라에 갔다는 소식을 접했다.  웃음이 많고 너무나 맑았던 친구, 모두에게 즐거움을 주면서도 생각이 깊었던 친구.  이젠 그 친구를 살아서는 다시 볼 수 없다는 사실이 아직도 실은 잘 믿기지 않는다.



상실과 애도에 대하여


상실은 '잃어버림'이다.  우리는 참 많은 것들을 잃어버리며 산다.  잃어버리는 순간은 보통 예기치 않게 찾아온다.  잃어버림은 주로 나의 선택과는 무관하게 찾아온다.  상실은 때로는 우연히, 때로는 사고처럼 우리를 찾는다.  잃어버린다는 것은 나라는 존재의 살점 일부가 떨어져 나가는 것이다.  살점이 떨어져 나간 자리에는 필연적으로 상처가 남는다.  내가 그 대상과의 관계에 의미를 부여하고 의미를 느꼈던 만큼 상처의 크기는 다를 수 있다.  물론 가장 아픈 상실은 사랑하는 이의 죽음이다. 


애도는 '떠나보냄'이다.  상실의 순간이 예기치 않게 찾아온다고 하더라도 우리 모두는 결국 그 대상을 놓아주고 떠나보내게 된다.  어떤 떠나보냄은 잠깐의 시간으로 충분할지 모르지만 또 다른 떠나보냄은 아주 오랜 시간이 걸리기도 한다.  아끼던 물건을 잃어버린 경우, 마음이 착잡하고 아쉽기야 하겠지만 대개의 경우 며칠 지나면 그 사실을 비교적 쉽사리 받아들일 수 있다.  하지만 가족, 친구, 또는 다른 사랑하는 이를 떠나보내는 일에는 수개월에서 수년이 걸린다.  때로는 평생이 다 흘러도 그 과정이 끝나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런 면에서 애도는 일시적인 사건이 아니라 지속되는 과정이다.  




상실에 따르는 감정들


상실에는 여러 감정이 뒤따른다.  말 그대로 상실감, 좌절감, 절망감, 그리움, 분노, 원망, 불안, 우울, 죄책감, 그리고 또 다른 여러 감정들.  일렁이는 마음을 들여다보니 나에겐 두 가지 마음이 떠오른다.


먼저는 그리움.  그리움에는 예고가 없다.  자꾸만 생각이 난다.  사실 트라우마 또는 애도 상담과 관련해서는 침투적 사고 (intrusive thoughts) 라는 용어가 있는데, 고통스러운 기억이나 생각이 자꾸 머릿속을 맴돌고 그 생각을 조절하기 어려운 증상을 말한다.  글쎄, 나는 그게 무엇이 되었든 그냥 그리움이라 칭하고 싶다.  그 친구의 농담과 웃음소리가 그립고, 그 친구와 함께 하던 또 다른 소중한 사람들이 그립고, 그 모두와 함께 하던 그 시절이 그립다. 


그리고 죄책감.  죄책감은 상실 뒤에 뒤따르는 보편적인 감정이다. 내가 더 할 수 있었던 일은 없었을까.  생전에 연락이라도 조금 더 해 볼걸.  내 경우는 시간대가 아예 다른 곳에서 사느라 마지막 순간에 잠깐 통화를 나눌 기회조차 놓쳤다.  친구의 죽음을 접하고도 나의 일상이 마치 아무 일 없다는 듯이 이어지는 걸 보면서도 죄책감을 느낀다.  농담 가득한 시끌 벅적한 줌 미팅을 마치고 나서 홀연 오피스의 적막이 내게 위선자라고 말하는 것 같다.  나의 내담자가 이런 얘기를 한다면 해주고 싶을 법한 말들이 나 스스로에게는 잘 나오지 않는다. 




애도는 지극히 개인적인 과정이다


애도에는 부정 - 분노 - 협상 - 우울 - 수용에 걸쳐진 단계가 있다고 잘 알려져 있다.  하지만 애도는 실로 지극히 개인적인 과정이다.  상실에 대하여 더 격렬하게 반응하거나 더 오랫동안 애도의 과정을 거친다고 해서 그 방식이 더 진실하다거나 고차원적인 건 아니다.  상실과 애도를 흔히 극복해야 할 대상으로 보는 시각도 종종 있다.  그러나 애도란 오히려 상실과 함께 살아가는 방법을 터득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극복'이 아닌 '적응'의 대상인 셈이다.  그리고 그 적응의 모습은 개인마다 다를 수 있다. 


그럼에도 공통적으로 해야 할 일이 있다면, '직면'과 '수용'이다.  직면이란 상실을 부정하거나 축소하거나, 또는 상실의 경험으로부터 도망치지 않고 그 사실을 똑바로 마주하는 것이다.  수용이란 애도란 개인적인 과정임을 기억하며 스스로의 반응을 판단하지 않고 받아들이는 일이다.  꺽꺽 소리가 날 정도의 통곡에도, 생각보다 담담한듯한 반응에도, 거기엔 모두 그럴만한 이유가 있으리라 여겨주는 것이다.  상실의 아픔을 나눌 수 있는 믿을만한 이들과 고통을 나누고 그들로부터 정서적 지지를 얻는 일도 수용에 해당된다. 




나 역시 적응의 과정을 겪고 있다.  그래도 믿음 안에서 강건했던 친구이기에 소망이 있다.  직면과 수용을 향해 나아가고 있다.  이 글도 그 여정의 일부이다.  세상은 마치 아무 일도 없다는 듯 이어진다.  나의 삶도 마찬가지다.  그저 하는 일이라고는 친구의 생각이 날 때마다 잠깐씩 추억을 되짚는 일,  애도와 기도의 시간을 잠깐이나마 가지는 것.


정말 친구마냥 맑은 가을하늘이었다.  마지막 순간에 이야기를 나누지 못한 것이, 진심을 전하지 못한 것이 못내 아쉽다.  좋은 추억을 많이 남겨주어 고맙다고, 너는 참 아름다운 삶을 살던 친구였다고, 우리가 함께 추억을 쌓던 다른 친구들과 함께 늘 너를 추억하겠다고 친구에게 말해주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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