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군장교 후보생 시절의 어느 날이었다. 그날은 굉장히 특별했다. 황순원 소설 ‘소나기’에 나오는 소년과 소녀가 징검다리에서 처음 만난 날 또는 알퐁스 도데의 소설 ‘별’에서 휴가를 얻은 노라드 아주머니를 대신해 스테파네트 아가씨가 목동에게 간 날과 흡사했다. 수많은 사람 사이에서 낯선 얼굴 하나가 흙 속의 진주마냥 유난히 빛나고 있었다.
너무나 순수했던 대학교 1학년 때 정말 여우에 홀린 듯 겉과 속이 다른 한 여자를 쫓아다니며 온갖 고생을 다 한 이후로 내 마음은 완전히 굳게 닫혀있었다. 누군가 내게 다가와 “열려라! 참깨!”라고 외친다 한들 꿈쩍하지 않을 태세였다. 그렇게 홀로 황폐한 사막 위를 마냥 걷고 또 걷고 있었는데 우연히 오아시스를 발견한 것이다.
수업이 끝난 후 사나이답게 용기를 내어 그녀에게 달려가 늑대처럼 기습 키스를 시도했다면 새빨간 거짓말이고 일단 계획대로 그녀 친구에게 접촉을 시도했다. 잠시 대화를 나눠보니 그녀 친구는 나와 고향이 같았다. 전진하기 위한 튼실한 교두보가 확보되는 순간이었다. 그러나 뜻밖의 난관에 부딪혔다. 그녀는 나보다 두 살 연상이었다. 대학교 1학년 때 내게 악몽을 안겨준 여자가 다름 아닌 한 살 연상이었다. 걱정이 잠시 밀려왔지만 나는 제임스 딘을 떠올렸다. 청춘을 무기 삼아 돌격하기로 마음먹었다.
화창한 토요일, 유난히 신경 써서 단복을 차려입고 전주의 명소 객사로 향했다. 조금 어색한 인사를 나눈 뒤 그녀와 나는 제법 분위기 있는 카페 안으로 들어섰다. 예상외로 떨리지 않았다. 아주 편하고 자연스러웠다. 누나라고 부를게요. 내가 먼저 운을 뗐다. 본격적인 대화는 그녀를 만나기 위한 나의 힘겨운 여정을 주제로 시작됐다. 내 용기에 박수를 보내주는 듯 그녀는 살며시 미소 지었다. 『연애학개론』이란 책에서 터득한 대로 내 얘기는 최대한 줄이고 친한 형의 얘기를 많이 했다. 그녀의 신뢰를 얻기 위해 묘한 전술을 펼친 것이다.
통상 그렇듯 다음 장소는 극장이었다. 사랑하는 사람과 나란히 앉아서 한 곳을 바라보는 일은 그야말로 황홀했다. 슬픈 장면이 나온 후에 그녀가 “너 울었지?”라고 말하며 생끗 웃던 모습은 지금도 내 가슴속에 조각처럼 새겨져 있다.
당시 나는 학군단 채플 행사를 준비하고 있었다. 평일 저녁 여섯 시부터 열 시까지 피아노 강의실에서 노래와 춤을 배웠다. 단독으로 노래 부를 사람이 필요했는데 우연히 내가 선발되었고 나는 이 기회를 적극적으로 활용해 일생일대의 특별한 작전을 기획했다. 그것은 바로 I급 비밀 공개 포위 작전! 하이마트 광고의 CM송을 개작해서 부른 후 꽃다발을 미끼로 그녀를 포위하는 것이다. CM송은 베르디 오페라 ‘리골라토’에 나오는 ‘여자의 마음’이란 곡으로서 남녀 혼성으로 부르는 곡이었다. 나는 이 곡을 혼자서 코믹하게 부르기로 했다.
연습과 연습 끝에 드디어 공연 당일이 되었다. 도로 위를 질주하는 스포츠카 엔진마냥 심장이 요동쳤다. 동기들의 응원을 수차례 받았지만 긴장감이 쉽게 가라앉지 않았다. 100미터 선수가 출발선에 서듯 무대 위에 섰고 비로소 작전은 개시되었다.
“안녕하십니까? 저는 전주대 학군단의 귀염둥이 803번 후보생 김태영(필자의 본명)이라고 합니다. 제가 요새 즐겨 부르는 노래를 불러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많은 박수 부탁드립니다. 먼저 오리지널 버전입니다.”
잠시 목소리를 가다듬었다. 관객석에서 웃음소리가 새어 나왔다.
“(바리톤 풍으로 남자 목소리) 시간 좀 내주오! 갈 데가 있소.”
이때 한 여성이 충격을 먹었는지 비명을 질렀다.
“(소프라노 풍으로 여자 목소리) 거기가 어디요?”
“(바리톤 풍으로 남자 목소리) 하이마트!”
“(소프라노 풍으로 여자 목소리) 아니, 그럼 지금 결혼하잔 얘기? 아잉 좋아요. 가요옹~!”
클라이맥스에서 일부러 웃기려고 일명 삑사리를 냈다. 관람하던 학생들은 배꼽을 잡고 웃었다.
“딱 걸렸네!”
이 부분은 동기들이 웃으면서 합창을 해주었다.
채플 지도 선배님은 혹시나 반응이 썰렁할까 봐 걱정했었다. 하지만 그 걱정은 일순간에 날아가 버렸다. 나는 관객들의 대대적인 호응에 어찌할 바를 몰랐다.
“다음으로 하이마트 공개구혼 버전을 불러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또다시 목소리를 가다듬었다. 좀 더 분발하기 위해 노력했다.
“(바리톤 풍으로 남자 목소리) 장미꽃 좀 주우오. 줄 사람이 이잇쏘오.”
“(소프라노 풍으로 여자 목소리) 그 여인이 누구요?”
“(바리톤 풍으로 남자 목소리) 국어국문학과 00학번 바악현주.”
관객석에서 일제히 우와 하고 감탄하는 소리가 났다. 그리고 여기저기서 웃는 소리가 새어 나왔다.
“(소프라노 풍으로 여자 목소리) 아니, 그럼 지금 대시하려는 얘기? 아잉 좋아요. 잘해봐요옹.”
고음 부분에서 다시 한번 삑사리를 내주었다.
“딱 걸렸네!”
동기들 모두가 웃으며 박수를 보냈다.
나는 노래가 끝남과 동시에 잽싸게 무대 안에 감춰두었던 부케 모양의 장미꽃 한 다발을 들었다. 세상의 모든 행복을 한꺼번에 맛본 듯 환한 얼굴을 하고서 성큼성큼 그녀에게 다가갔다. 관객들의 뜨거운 박수갈채가 쏟아졌다. 일순간 그녀 외에는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무대 위 조명 중에 단 하나만 살아남아 그녀의 얼굴을 비치는 것 같았다. 내 얼굴은 홍시처럼 붉게 달아올랐다. 전투에 승리한 영웅처럼 늠름하게 경례를 한 후 무릎을 꿇고서 장미꽃을 전달했다. 그녀는 수줍게 웃으며 장미꽃을 품에 안았다. 그러자 안개가 걷히듯 주변이 서서히 보이기 시작했다.
“프러포즈를 받아들이실 의향이 있으신가요?”
채플 지도 선배님이 웃으면서 그녀에게 말을 걸었다. 그녀는 어쩔 줄 몰라 했다. 잠시 망설이다가 입을 떼었다.
“음, 앞으로 지켜볼게요.”
관객석에서 또다시 박수갈채가 터져 나왔다. 뽀뽀하라는 말이 들리기도 했다. 나는 관객들에게 나의 트레이드마크를 선보였다. 눈을 끔뻑거리며 바보처럼 웃었다. 확실한 대답을 듣고 싶었지만 이걸로도 만족했다. 작전은 그야말로 대성공이었다. 무공훈장은 떼 놓은 당상이었다.
그녀와 나는 레스토랑에서 재회했다. 창가 쪽에 자리를 잡고 마주 앉았다. 커피가 나오기 전 테이블 위에 살며시 예쁘게 포장된 선물을 올려놓았다. 그 안에는 빨간 지갑이 들어있었다.
“누나, 이제 나 누나의 보디가드가 돼도 되지?”
재밌게 돌려서 말했지만 마음만은 진지했다. 그녀는 유명 개그맨의 유행어를 들은 듯 함박웃음을 터트렸다.
“너, 참 재밌다!”
잠시 생각에 잠기더니 이윽고 차분히 가라앉은 어조로 말했다.
“태영아, 솔직히 내가 말해줄게. 난 말야. 너에 대한 좋은 감정이 있는 건 사실이야. 하지만 연인으로서의 너에 대해선 아무런 느낌이 없어. 일방통행은 안 좋다고 생각해. 그저 편하게 얘기하고 연락할 수 있는 사이로 지냈으면 해. 그리고 너는 나에 대해서 아직 잘 알지 못하잖니? 내 말뜻이 뭔지 이해하겠어? 아무튼 고마워. 오늘 이벤트는 평생 잊지 못할 것 같아.”
기대는 처참히 무너졌다. 내색하지 않으려 억지로 피식하고 웃었다.
그녀와 나는 기숙사 앞까지 함께 거닐었다. 우릴 알아본 한 남녀가 다짜고짜 크게 외쳤다.
“오늘 너무 멋졌어요!”
그날 이후 나는 대학교의 명물이 되었다. 일명 하이마트 후보생! 안 그래도 늘 단복을 입고 다녀서 시선을 모으곤 했는데 유명세를 치르자 이완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수많은 시선이 나를 향했다. 어떤 여학생들은 내 옆을 지날 적에 일부러 하이마트 CM송을 부르기도 했다. 참 민망하기 짝이 없는 노릇이었다.
열 번 찍어 안 넘어가는 나무 없다는 신념으로 그녀에게 가까이 다가가려고 갖은 노력을 아끼지 않았다. 그녀의 기숙사 방 전화번호를 누를 때 그리고 송신이 걸려서 신호음이 들릴 때 그 가슴 설렘은 아직도 잊지 못한다. 신호음이 끊기면서 그녀의 달달한 목소리가 귓가에 머물면 내 마음은 그렇게 평온할 수가 없었다. 그러나 일방통행은 너무나 힘겨운 일이었다. 거대한 파도가 몰려와 한 청년의 조각배를 삼켜버렸다.
그랬다. 그녀는 내 옆을 잠깐 스쳐 지나가는 존재에 지나지 않았다. 하지만 좋은 사람이었고 그런 사람을 사랑했다는 것은 내게 더할 나위 없이 크나큰 행운이었다. 절대 슬프지만은 않았다. 그녀가 떠나간 후에도 그녀의 향기는 아름답게 남았다.
열렬한 사랑의 대가로 얻은 마음의 상처가 거의 아물어갈 즈음 학군단 선배와 떠났던 지리산 여행이 생각난다. 천왕봉이 얼마 남지 않은 지점에서 앞서가던 선배가 뒤돌아보며 내게 말했다.
“힘내! 일출 보면서 그녀의 행복을 빌어줘야지!”
잠시 잊고 있었던 그녀의 얼굴을 떠올렸다. 남은 힘을 다해 악착같이 걸음을 옮겨 마침내 천왕봉에 올라섰다. 발밑으로 구름이 저 멀리 지평선까지 죽 펼쳐져 있었다. 알래스카 빙하 같았다. 비가 와서 일출을 못 볼 것이라는 대피소 직원의 예상은 틀렸다. 구름 속에서 꿈틀대는 해의 영험한 기운이 느껴졌다. 잠시 후 해가 구름을 가르고 봉긋 솟아올랐다. 일대 장관이었다. 나는 얼어붙은 듯 한참 동안 멍하니 서 있었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