컴퓨터가 귀에 거슬릴 정도로 굉음을 내기 시작한 건 아주 오래전 일이었다. 별 신경을 쓰지 않아서 그 시기가 대략 언제였는지 짐작도 가지 않을뿐더러 언제부터 작았던 소리가 이렇게 커졌는지 도무지 알 수 없었다. 그냥 소리가 조금 나면 나는가 보다, 조금 소리가 커지면 커졌나 보다 했다. 단지 인터넷만 할 수 있다면 그걸로 만족했다.
며칠 전 컴퓨터 전원을 켜놓은 채 책을 읽을 때 비로소 굉음을 인식했고 수리의 필요성을 절감했다. 하지만 바쁘다는 핑계로 차일피일 미루다 보니, 결국 컴퓨터는 작동을 멈춰버렸다. 백지같이 하얀 머릿속에 빨간 실선 하나가 죽 그러진 듯했다. 굉음은 죽음을 예지한 컴퓨터의 비명이었던 것이다.
그야말로 안달이 났다. 인터넷 세상은 달콤한 휴식처였는데 그 공간이 일순간에 증발해버렸기 때문이다. 늦은 저녁이었지만 가까운 서비스 센터에 전활 걸었다. 방문 수리가 불가능하다는 직원의 말에 가야 할지 말아야 할지 잠시 고민하다가 용단을 내렸다. 컴퓨터를 애완동물마냥 껴안고서 택시를 붙잡았다. 서비스 센터에 도착하자 직원은 능숙하게 컴퓨터를 분해했다. 물끄러미 안을 들여다보며 입을 열었다.
“이제까지 작동한 게 정말 신기할 정도예요. 고치면 당분간 그럭저럭 쓰겠지만 아마 얼마 못 갈 겁니다.”
컴퓨터는 마법에서 풀려나듯 다시 굉음을 내며 되살아났다. 뒤늦은 후회가 거대한 해일처럼 밀려왔다. 이상을 알았을 때 바로 고칠 걸……. 몹시 안타깝고 측은해 보이기까지 했다.
평범한 일상에 미세한 균열이 일어난 것 같았다. 컴퓨터가 소중한 존재였단 걸 이제야 깨달았다. 이름이라도 지어줄까?
돌이켜보니, 컴퓨터는 그 누구보다 오랫동안 나와 군 생활을 함께한 동료였다. 소대장 2년 차에 샀으니까 지금까지 무려 5년을 동고동락한 셈이다. 당시 해안 소초장이었던 나는 매일 미니 축구만 하던 소대원들이 안쓰러워 영화를 보여주기 위해 큰맘 먹고 TV에 연결할 수 있는 컴퓨터를 샀다. 모두의 기대 속에 포장지가 벗겨지고 위풍당당 자태를 뽐내던 순간은 지금도 생생하다. 생활관에 옹기종기 모여 앉아 커튼을 내린 후 재생 버튼을 눌렀을 때 그 웅장한 음향과 더불어 시선을 단번에 흡수하던 영상은 또 어떠하였던가. 대형 극장이 부럽지 않았다. 힘든 야간 매복과 이른 새벽 수색정찰로 인해 지쳐있던 우리에게 컴퓨터는 크나큰 활력소가 되어주었다. 덕분에 스타크래프트 게임도 즐길 수 있었다.
2년간의 해안 소초장 임무가 끝나자 연예인이 은퇴하듯 컴퓨터는 생활관보다 작고 초라한 독신 숙소에 쉴 곳을 마련했다. 그 이후 컴퓨터는 소대원들의 유쾌한 웃음과 박수 소리를 더는 들을 수 없었다. 컴퓨터를 산 본래 목적이 바래져 가고 있었고 컴퓨터는 내 방에서 나만의 유일한 소유물로 전락하고 말았다. 부대가 여러 번 바뀜에 따라 상자에 실려 이곳저곳 이동하는 동안 상하지 않은 데가 없었을 것이다.
직원 말대로 컴퓨터는 끝내 숨을 거두고 말았다. 주목받지 못한 조연이 무대 뒤로 바람처럼 쓸쓸하게 사라지는 듯했다. 돈을 아끼기 위해 마지막 순간까지 부려먹은 게 아닌지 죄책감이 들었다.
컴퓨터는 살아있는 동안 조건 없는 희생을 감내하였다. 때론 아픈 곳을 호소했으나 주인에게조차 무시당한 하찮은 도구에 지나지 않았다. 김춘수의 시 「꽃」처럼 만약 내가 컴퓨터의 이름을 불러줬다면 어땠을까. 컴퓨터는 내게 묵직한 가르침을 선사한 스승이었고 나는 그 가르침을 받는 학생에 불과했다. 컴퓨터를 사용한 게 아니라 미천한 내가 컴퓨터에 의지한 것이다.
앞만 보며 질주하던 말 한 마리가 경주를 멈추고 주변을 둘러보기 시작했다. 잊고 지냈던 소중한 존재들이 하나둘 떠올랐다. 부모님, 친구들, 중대원들, 은사님……. 그들의 얼굴에는 하나같이 묵은 먼지가 켜켜이 쌓여 있었다. 그들의 사랑과 관심을 너무나 당연하게 여긴 탓이다. 천천히 닦고 또 닦았다. 오색찬란한 본연의 빛깔이 눈부시게 펼쳐졌다.
올해 설날, 부대에 격려차 방문하신 사단장님의 덕담이 생각난다. 가슴에 화살처럼 꽂혀 잊히지 않았다.
“감사할 줄 아는 사람은 계속 감사할 일이 생긴다는 걸 명심해.”
나는 앞으로 살아가는 동안 사소한 하나에도 관심을 두고 그것으로부터 아름다움과 향기를 추출하는 열렬한 탐구자가 되기로 하였다. 항상 감사할 줄 아는 마음을 간직한다면 내 미래는 늘 행복과 설레는 꿈으로 가득 찰 거라고 확신한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