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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이재 May 08. 2016

퇴계의 발자취를 따라서

퇴계 예던길

1564년 어느 날, 퇴계 이황은 청량산 산행을 위해 지인 열여섯 명을 초대했다. 홀로 사색하며 걷기 좋아하던 그의 성품으로 보았을 적에 매우 이례적이지 않을 수 없었다. 후학들에게 ‘산행의 의미’를 되새겨주고자 함이 주된 목적이었으나 또 다른 의도가 숨겨져 있던 것으로 보인다. 당시 그의 나이가 64세였고 이 산행은 그의 마지막 산행이었다. 아마도 그는 나이가 더 들기 전에 도산서원에서 청량산에 이르는 아름다운 길을 일러주고 싶었을 것이다. 당일 참석한 열세 명 중 유일한 친구인 이문량에게 이런 시를 써서 보여주었다.


烟巒簇簇水溶溶 산봉우리 봉긋봉긋 물소리 졸졸

曙色初分壹欲紅 새벽 여명 걷히고 해가 솟아오르네

溪上待君君不芝 강가에서 기다리나 임은 오지 않아

擧鞭先入畵圖中 내 먼저 고삐 잡고 그림 속으로 들어가네


번갯불에 콩 구워 먹듯 시간 되는 사람만 급작스레 모집했다. 형님 세 분과 누님 한 분 그리고 나 이렇게 독수리 오형제는 ‘퇴계 예던길’로 향했다. B형님이 단체여행을 위해 특별히 매입한 중고 12인승 이스타나는 힘이 남아도는 게 아닌가 싶을 정도로 내달렸다. 오후 네 시경 쏘두들 마을 입구에 당도했다. 쏘두들은 마을 앞 낙동강 물이 올미라는 절벽에 부딪쳐 깊은 소(沼, 움푹 패어 물이 고인 곳)를 이루었는데 이 소의 언덕 부분이 마을에 위치하고 있기 때문에 불리어진 이름이다. 


탄성이 절로 터져 나왔다. 기암절벽 가송협(佳松峽)이 위엄을 드러낸 것이다. 낙동강 1,400리 물길 가운데 가장 빼어난 모습이라는 선인들의 평가는 과언이 아니었다. 협곡 사이를 빠져나간 강물은 마을 앞을 지나 우측으로 S자 곡선을 이루며 유유히 흘러가고 있었다. 차를 몰고 좀 더 앞으로 가니 맞은편 협곡 아래에 자리한 고산정이 보였다. 퇴계가 아끼던 제자 금난수가 지은 정자로 주변 경관이 뛰어나 퇴계를 비롯한 선비들의 내왕이 잦았다고 한다. 비췻빛 물 위에 고산정의 그림자가 짙게 드리워져 또 하나의 매혹적인 세상이 열렸다. ‘강가에 자리한 푸른 골뱅이 한 마리의 모습’이라는 표현이 매우 적절함을 실감했다. 비가 많이 올 적에 잠기곤 해서 일명 ‘잠수교’라 불리는 작은 다리를 건너 가송마을도 둘러보았다. ‘아름다울 가(佳)’에 ‘소나무 송(松)’. 풀이하면 ‘아름다운 소나무가 있는 마을’이다. 퇴계가 생전에 불러준 이름이라고 전해진다. 


예던길 중간에 위치한 농암종택으로 향했다. 농암종택은 ‘어부가’로 잘 알려진 문인 농암 이현보가 살았던 집이다. 본래 분천동에 있었으나 안동댐 건설로 인해 이곳으로 옮겨졌다. 이현보는 퇴계와 막역지간이었다. 목금(木禁, 나뭇가지로 엮어 임시로 만든 조그만 뗏목) 위에 올린 술잔을 서로 주고받으며 풍류를 즐겼다고 한다. 운 좋게도 방 하나가 비어있었다. 살갑게 반겨주시는 주인아주머니의 사투리가 정겨웠다. 사진 찍으러 왔다고 하니까 이런 비밀을 누설해주셨다. 


“학수대(鶴巢臺)로 올라가가(올라가서) 삼거리가 나오면 한 발짝 뒤로 물러서요. 왼편 토끼길 지나 다람쥐길 그 짜(그 쪽)로 가몬(가면) 낭떠러지 철책이 나와요. 그 짜(그 쪽)서 앉아서 보문(보면) 최고예요. 우리 부부만 아는 기라(알고 있어요).”


저녁식사는 안동시장으로 가서 안동찜닭을 먹었다. 서울과 달리 달지 않고 담백한 맛이 일품이었다. 공깃밥도 뚝딱 해치웠다. 종택으로 되돌아온 우리는 바깥채 구들방에 앉아 도란도란 이야기꽃을 피웠다. 마치 고향에 온 듯 마음이 푸근해졌다. 처마에 부딪치는 빗소리는 경쾌했고 귀뚜라미, 풀벌레 울음소리는 은은하게 귓가를 울렸다. 


오랜만에 단잠을 자고 일어나 간단하게 아침을 때운 후 본격적인 예던길 산행에 나섰다. 흐린 날씨에 약간의 비가 내렸다. 학수대 등산은 포기하고 ‘가송리 예던길’을 걷기로 했다. 우산을 치켜들었다. 오묘한 안개를 온몸에 두르고 목만 삐죽 내민 앞산의 모습은 한 편의 수묵화를 떠올리게 했다. 퇴계가 말한 ‘그림 속으로’ 들어가는 길이 열린 걸까. 몽환의 세계란 바로 이런 곳을 두고 하는 말인가. 마치 타임머신을 타고 과거로 여행 온 것만 같았다. 


병풍처럼 늘어선 절벽 벽력암(霹靂巖) 앞에 섰다. 강원도에서 내려온 뗏목들이 절벽에 부딪힐 때 벼락 치는 소리가 났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이곳 주위의 물은 유독 서늘한데 찬 기운이 바위 아래에서 솟아나기 때문이다. 그래서 못의 이름이 한속담(寒粟潭)이다. 한속은 추울 때 몸에 돋는 소름을 뜻한다. 비 때문에 물에 잠긴 돌다리를 맨발로 건넜다. 돌다리 오른편에 물음표를 연상시키는 백로가 홀로 서 있다가 인기척에 놀랐는지 갑자기 날아올랐다. 풍경을 음미하던 그를 방해한 건 아닐까. 맞은편에 당도해 뒤를 돌아봤다. 천연기념물 먹황새의 마지막 서식처였던 바위 절벽 학소대가 멋진 자태를 뽐내고 있었다. 흐드러지게 핀 메밀꽃밭을 지나 전망대에 올라서니 낙동강과 어우러진 협곡 그리고 농암종택이 한눈에 내려다 보였다. 화려하진 않지만 단아한 멋과 깊은 품위가 느껴졌다. 다시 발걸음을 옮겨 월명담(月明潭)으로 향했다. 


‘선현들이 신발과 지팡이를 끌고 다니셨던 길’이라 부를 만큼 매우 험했던 길은 정갈하게 다듬어져 호젓한 오솔길이 되어있었다. 문득 생각에 잠겼다. 퇴계가 학문의 이치를 구하다 ‘생각의 길’이 막히면 거닐었다던 이 길 위에서 그는 과연 무슨 생각을 했을까. 비는 잠시 그쳤다가 다시 쏟아졌다. 이번엔 꽤나 거세졌다. 미천한 나는 도무지 알 까닭이 없었다. 그저 말없이 걷고 또 걸었다. 예전에는 비가 올 때 간혹 슬펐던 적이 있었는데 지금은 전혀 그러지 않았다. 비 내리는 길의 운치를 마음껏 즐겼다. 시련을 딛고 일어선 후 세상을 여유롭게 관망할 줄 아는 나이가 된 것인가. 숨이 가빠지고 땀이 차올랐다. 정신은 더없이 맑아졌다. 이 순간이라면 못에 내 영혼을 비춰도 문제 될 게 없을 듯싶었다. 


예로부터 성현이 나타나면 봉황이 깃든다고 믿었는데 봉황은 오동나무에만 앉았다고 한다. 그래서 마을 사람들은 오래전부터 성현이 출생하기를 기원하며 산길 곳곳에 오동나무를 심었다. 하지만 나는 오동나무를 분별할 줄 모르니 스치는 나무를 보고 지레짐작할 뿐이었다. 아름드리나무를 타고 위로 올라간 앙증맞은 넝쿨, 푸른 이끼가 낀 죽은 나무, 이름 모를 들꽃들이 자신의 존재를 알리며 내 발길을 잠시 붙잡았다. 


아찔한 절벽 위에 긴 의자가 두 개 놓여있었다. 이 아래가 바로 월명담이다. 달빛이 쏟아지는 연못 같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30여 년 전까지만 해도 절벽 위에서 주민들은 기우제를 지냈다고 한다. 못에 용이 산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오른편 나뭇가지 사이로 길 하나가 보였다. 강을 끼고 가파른 바위 벼랑을 아슬아슬 따라가는 길이다. 안전을 위한 나무 말뚝이 촘촘히 박혀있다. 왼편에는 오른쪽으로 휘돌아가는 낙동강 물줄기가 보였다. 형님들은 담배를 피우고 나는 땀을 식혔다. 이제 길이 얼마 남지 않았다. 다시 힘을 냈다. 종종 보이는 산악회의 빨간 리본을 이정표 삼아 고개 하나를 넘었다. 어떤 이의 간절한 소원이 깃든 돌탑 앞을 지나 비에 젖은 나뭇잎들이 수놓은 길을 밟으며 천천히 걸었다. 한때 산악인이었던 B형님은 줄곧 앞장서서 걷고 있었다. 세상 다 가진 듯 달콤하게 웃으면서 말했다. 

“캬∼ 조오타!”


드디어 가송리 마을에 다다랐다. 누렇게 물든 들판과 푸른 배추밭 그리고 탐스럽게 잘 익은 사과나무가 보였다. 들판 옆에는 형형색색의 바람개비가 세워져 있었다. 학문에 매진하면서도 풍류를 즐길 줄 알았던 퇴계가 예던길을 사랑했던 이유를 어렴풋이 알 것 같았다. 명색이 시인인 나는 시 한 수를 읊어보려 했으나 아직 미숙하여 실행에 옮기지 못했다. 


여전히 아름다운 이곳으로 둥지를 틀기 위해 힘차게 날갯짓하며 날아오는 먹황새의 모습이 저 멀리에 보일 것만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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