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소기업 콘텐츠 마케터로 살아남기(3)

마케터 인턴이 인사팀이자 홈페이지 담당자이자 언론사 편집인이 되는 기적

by 비상구가빨강

처음엔 그랬다. 콘텐츠 마케터라고 하니 콘텐츠를 만들었다. 기획하고, 편집하고, 관리하고. 일이 많긴 해도 적어도 이름과 역할은 일치했다. 근데 이상하게도 시간이 흐를수록 ‘도와줄 수 있어?’로 시작한 일들이 그냥 내 일이 되어갔다. 기획이었는데 인사팀 일이 되고, 편집이었는데 총무 같은 일을 하고 있었다. 누가 보면 다 내 전공인 줄 알겠다.

가장 황당했던 건 외국인 대상 행사 준비였다. 외국어 가능자를 단기 알바로 뽑아야 한다며 알바몬 계정을 나한테 넘기더니, 지원서 검토부터 면접 일정 조율까지 전부 해달라고 했다. 업무 분장이 이런 식으로 이뤄진다는 걸 그때 처음 체감했다. 인사팀은 존재하긴 했다. 실장도 있었다. 다만 그 사람은 대표 친구였고 진짜 ‘일’은 하지 않았다. 어쩐지, 업무 공백이 생기면 자꾸 밑으로 내려오더라. 대체 왜 그런 일까지 하고 있나 싶었지만, 어느새 나는 지원자 엑셀을 정리하고 있었다.



정도가 있다면, 언론사 편집인을 내 이름으로 등록하자는 이야기는 그 선을 넘은 순간이었다. 보통 언론사 홈페이지 하단에는 편집인, 청소년보호책임자 같은 정보가 적히는데, 그 자리에 내 이름을 넣자고 했다. 발행인은 대표고, 나머지는 인턴인 나더러 책임지라는 식이었다. 그걸 듣는 순간 ‘좋은 건 위에서 가져가고, 법적 책임은 아래로 미는구나’ 싶었다. 이상하다고 말은 했고 결국 이름이 올라가진 않았지만, 그 이후부터 내 태도에 대해 말이 나왔다. “홈페이지 관리를 왜 이렇게 소홀히 하냐”는 식으로.

그건 정말 당황스러웠다. 나는 홈페이지 담당자가 아니었고, 인수인계도 없었고, 운영사 연락처조차 받은 적이 없었다. 할 수 없다고 말했더니 네가 하지 않으면 대체 누가 하냐는 대답이 돌아왔다. 월급은 인턴 월급인데 무슨, 나보고 이 쥐꼬리로 뭘 하라고.



그 일이 반복되면서 점점 알게 됐다. 이 조직에선 누군가가 뭔가를 해야 하는 상황이 생기면 가장 말이 적은 사람한테 일이 내려온다는 걸. 정확히는, 말이 적고 직급이 낮은 사람. 그리고 대부분 그게 나였다. 내가 아니면 누가 하냐는 질문은 사실 “네가 하는 게 제일 편하다”는 말의 포장일 뿐이었다.

그래서 책임도 자연스럽게 넘어왔다. 내가 관리하지 않은 시스템의 오류가 내 탓이 됐고, 내가 인수인계받지 않은 업무의 공백도 내 몫이 됐다. 내가 만든 문제가 아님을 설명해도 소용없었다. 그런 설명보다 필요한 건 ‘그럼 지금부터라도 해보겠다’는 자세였다. 알아서 해라,는 말을 돌려 말하면 결국 그렇다는 뜻이다.

그 시점부터 감정이 흔들렸다. 이건 단순히 일이 많아서 힘든 게 아니었다. 어디까지가 내 일인지 말할 수 없고, 책임은 정리되지 않은 채 내려오고, 나는 계속 내가 아니었던 사람처럼 일해야 했다. 마케터였다가 인사팀이었다가 시스템 관리자가 되었다가, 어느 날은 그냥 누군가의 방패막이 같았다. 직함은 그대로였지만, 역할은 사라지고 있었다.



결정적인 건 그날이었다. 또다시 시스템 문제에 대해 지적을 받았고, 그건 담당자가 따로 있다고 말했지만 돌아온 대답은 “그런 건 직접 알아가야지, 왜 못하겠다고만 하냐”였다. 그 말을 듣는 순간 속이 확 뒤집혔다. 인수인계도 없었고, 시스템 구조도 모르는 사람이, 그냥 거기 있었다는 이유만으로 비난을 받고 있었다. 그땐 참을 이유를 못 찾았다. 그래서 그 자리에서 말했다. 저 이번 달까지만 하겠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그 선택이 빠른 건 아니었다. 이미 오래전부터 이건 아니라고 느끼고 있었으니까. 그냥 버티던 거였다. 경력이 될 거라 믿어서, 그래도 이 경험은 어딘가에 쓰일 거라 생각해서. 그런데 점점 깨달았다. 이건 경력이 아니라 고장이었다. 더 이상 마케터로 일하는 게 아니라, 마케터인 척하는 사람이 되어 있었고, 그러다 어느 날 확실히 선을 넘는 순간이 오면, 그런 척조차 못 하게 된다. 나는 그 지점이 여기라고 판단했다.

퇴사하겠다고 말하고 나서야 조금 명확해졌다. 아무리 잘해도 내 일이 아닌 건 내 일이 아니고, 아무리 조용히 해도 책임은 무작위로 내려온다는 것. 그리고 더 중요한 건, 그 구조에서 계속 버티는 사람이 결국 책임까지 떠안는다는 사실. 나는 그걸 거절하기로 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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