뭐든 할 수 있을 때, 나는 뭘 하고 싶었을까
퇴사 후, 한동안은 딱히 뭐가 하기 싫었다. 일단은 좀 멈추고 싶었다. 거창한 이유라기보다, 단순히 지쳤던 것 같다. 그동안 무슨 일을 했는지 생각해 보면, 콘텐츠 마케터였던 것 같은데… 사실상 ‘일단 마케터니까 다 한다’는 사람에 가까웠다. 콘텐츠도 만들고, 홍보도 하고, 행사도 뛰고, 인사도 했고, 기사도 썼다. 그 과정에서 내 역할이 뭔지 잊어버릴 때가 많았다. 나중엔 그냥, 회사에 잘 붙어 있는 사람처럼 살았다.
퇴사 직전엔 그 생각이 강하게 들었다. 이제는 내가 뭘 하고 싶은지를 진짜 분명히 정해야겠다. 대학생 때는 막연히 ‘마케터’가 되고 싶었다. 콘텐츠 만드는 게 좋아서였고, 뭔가를 설계해서 사람들에게 전달하는 과정이 재미있다고 느꼈기 때문이다. 그런데 실제로 회사에 들어가서 ‘일’로 콘텐츠를 만들다 보니, 그 재미가 빠르게 사라졌다. 재미는 있었지만, 그 위에 오더와 피드백과 제약이 덧씌워지면 전혀 다른 무언가가 됐다. '잘 만든다'는 건 결국 '시키는 대로 잘 만든다'는 의미에 가까웠고, 그건 내가 생각한 마케터의 이미지와는 좀 멀었다.
무엇보다, 이것저것 다 해보는 건 나쁘지 않았지만, 아무것에도 전문가가 되지 못한다는 뜻이라는 걸 확실히 알게 됐다. 회사에서 나오는 일들을 그저 다루는 데 익숙해졌지만, 이 중 어떤 분야에선 내가 진짜 ‘잘’한다고 말할 수 있을지 자신이 없었다. 그래서 퇴사 후에는 그냥 좀 놀기로 했다. 실컷. 하루 종일 늦잠 자고, 늦게 일어나고, 일 없이 살아봤다. 예상보다 빨리 질렸다. 아니, 지겹다기보단... 다시 뭔가를 만들고 싶어졌다. 성향이 그런 것 같다. 생산적인 감각 없이 길게 쉬는 건 내 체질이 아니었다.
그래서 뭘 해볼까 고민하면서 이것저것 다시 건드려봤다. 글도 써보고, 영상도 만들어보고, SNS 계정도 관리해보고. 놀랍게도, 그 중에서 제일 손이 자주 가는 건 예전부터 좋아했던 ‘글쓰기’였다. 어렸을 때부터 뭔가를 써보는 건 늘 재미있었다. 보고서든 일기든, 발표든 기사든, 글로 구조를 짜고 어휘를 고르고 문장을 조율하는 과정이 나한텐 되게 자연스러웠다. 그걸 좀 더 살려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다시 자소서를 열었다. 이번엔 글을 중심으로 고른 회사 두 군데에 지원서를 넣었다. 하나는 IT 스타트업이었고, 다른 하나는 작은 PR 에이전시였다. 내가 글을 ‘그나마 잘한다’고 생각한 건 단순히 익숙해서가 아니라, 조금 더 갈고닦아 보면 진짜 내 무기가 될 수도 있겠다는 믿음이 생겼기 때문이었다. 아마도 나는 취미처럼 가져온 나의 문장으로, 언젠가는 전문가로 불리고 싶은 마음이 있었던 것 같다.
IT 스타트업은 기사를 쓰는 곳이었다. 일정량의 기사 콘텐츠를 생산하면, 그걸 기반으로 자동 기사 편집 시스템 같은 걸 개발하겠다는 목표가 있었다. 뭔가 내가 쓴 글이 쌓여 데이터처럼 관리된다는 것도 흥미로웠고, 기술 회사답게 연봉도 높았다. 리듬도 정리돼 보였고, 일머리 있는 팀일 것 같았다.
반면 PR 에이전시는 생긴 지 몇 년 되지 않았고, 아직 작았다. 하지만 글을 콘텐츠가 아니라 ‘브랜드의 말투’로 접근한다는 점에서 확실히 다르게 느껴졌다. PR은 단순히 무언가를 알리는 일이 아니라, 사람 대신 말해줄 말을 고르고, 기업이 위기일 때 가장 먼저 정리된 언어를 내보내는 일이라는 설명이 인상 깊었다. 내가 학교에서 부전공으로 배운 언론홍보 수업과도 딱 맞았다.
두 회사를 나란히 두고 고민했다. 둘 다 글을 중심으로 일하는 곳이었고, 둘 다 내가 잘할 수 있을 것 같았다. 하나는 내 글을 구조화해 시스템으로 만들려고 했고, 다른 하나는 내 글을 브랜드의 언어로 쓰려 했다. 하나는 기술 기반, 다른 하나는 감각 기반. 이상하게도 이번엔 조급하지 않았다. 둘 다 나를 필요로 했고, 나는 그중 하나를 고를 수 있었다. 나를 소모시키는 게 아니라, 정말 ‘어떤 나’를 키우고 싶은지 정하는 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