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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싸라 Oct 27. 2023

'꾸준히' 고민하고 '다양하게' 기웃해야 취향이 생긴다

 우리는 모두 누군가의 어깨 위에서 시작한다. 그 어깨를 각 가정 단위로 본다면 아마도 부모님이 제공해 주는 여러 가지 베네핏(즉, 돈 등의 물리적인 혹은 간접적인 경험/교육 등)이 될 거다. 그래서 사회생활 초창기에 이런 계산을 해본 적 있다. 만약 부모님이 얼마큼 금전적으로 도와주신다면 그건 도대체 내 인생에서 어느 정도의 가치가 있을까? 또 특별한 일(?)이 발생하지 않을 경우, 나는 얼마나 모을 수 있고 그건 도대체 현재가치로 얼마나 될까? 그래서 난 어떻게 살아야 될까? 미리 얘기하지만 이건 돈이 어떻고 금수저가 어떻고 이런 얘기가 아니다. 이건 '그래서 어떻게 살면 재밌을까'에 대한 얘기다.


 지금으로부터 15년 전을 기준으로 계산한 거라 현재 기준으로는 분명 차이가 있다. 하지만 그걸 감안하더라도 사회생활 초창기 시절 했던 계산과 기준도 나름대로 의미 있을 거라 생각해 예전에 썼던 글을 그대로 가져와 봤다.

 

 대학교를 졸업한 남성에, 28살에 직장을 구하고, 그 직장은 우리나라 100대 기업 평균 연봉 정도에, 대기업 기준 연차를 적용해 승진과 거기에 따른 급여 상승. 33살에 결혼, 36살에 애 1명을 낳고, 53살에 부장으로 회사에서 시원하게(?) 나오는 것으로. 저축은 젊은 때는 생각 없이 쓰는 걸 감안해 연봉의 5~10%, 좀 더 적극적으로 모을 수 있는 시기에는 35%까지. 마지막으로 금리는 3% 정도로.
 
 이것을 현재가치로 계산한 결과 4억 2천만 원 정도 나왔다. 쉽게 생각하면 우리 부모님이 내가 결혼한다고 4억 정도 되는 아파트 전세를 구해주실 경우, 내 인생의 25년 치에 해당되는 정도의 돈을 주신 것과 맞먹는 가치였다. 만약 돈이 문제라면 지금보다 훨씬 많은 돈을 벌 가능성이 큰 곳으로 옮겨 가는 게 맞을 거다. 근데 난 오히려 이런 생각이 들었다. 내 인생에 뭔가 다른 종류의 동전을 넣지 않으면 나도 이러한 프레임 속에서 살게 될 가능성이 높겠구나. 그랬더니 자연스럽게 스스로에게 이런 질문을 던지고 있었다. "그래서 앞으로 뭐 하고 살지? 뭘 해야 재밌을까? 뭘 해야 내 인생이 좀 더 나에게 의미가 있을까? 내가 좋아하고 잘하는 것은 무엇일까?'"
 
 장난처럼 들릴 수도 있겠지만, 가만히 생각해 보니 놀 때가 참 재밌었던 것 같다. 이런 상상도 해봤다. 죽음이 다가오고 있음을 알고 있지만 정신은 어느 정도 남아 있는 그 순간 내 인생을 돌아보며, “그때 그 동기들이랑 업무 마치고 술 더 마셨어야 했는데" 이런 생각은 안 할 것 같았다. 오히려 “그때 친구들이랑 더 재미있게 놀걸. 그때 그냥 아내와 우리 아이와 더 놀았어야 됐는데. 그때 그냥 부모님 모두 모시고 여행 갔었어야 했는데…”라는 생각을 하며 후회할 것 같았다. 그래서 내게 다시 한번 질문을 던졌다. 내가 좋아하는 것들이 구체적으로 무엇인지.   

 

 외근이 제법 있는 직무라 그날도 평소와 다름없이 오후 4시에 외부 미팅에 참석했다. 아뿔싸 근데 이 미팅이 너무 빨리 끝나버린 거다. 아, 근데 이게 웬일인가. 외부기관과 있는 저녁 일정까지 그쪽에서 일이 생겨 취소돼 버린 거다. 아내에게는 오늘 조금 늦게 들어갈 수 있다고 어제 미리 얘기했다. 하지만 방금 약속이 취소됐다는 얘기는 아직 안 했다. 그렇게 갑자기 나에게 다섯 시간의 여유시간이 생긴 거다. 강남역 한 복판, 여름이라 아직 해도 길고 화창해 짱짱한 날에.

 마냥 즐거울 거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아니었다. 갑자기 잠시 멍해지면서 "어, 이제 뭐 하지?" 이런 생각으로 머릿속이 가득 차 버렸다. 평소에 많이 놀고 있고 또 적극적으로 놀고 있다고 생각했던 듯한데, 갑자기 주어진 시간 앞에 난 주눅이 들고 말았다. 뭐랄까, 다양하게 놀고 있지도 않을뿐더러, 놀이에 대해 특별한 고민도 하지 않고 있다는 민낯을 마주한 느낌이랄까.

 

 그 이후였던 것 같다. 세상에는 얼마나 다양한 놀이가 있나? 다른 사람들은 뭐 하고 놀고 있을까를 찾아보기 시작한 게. 하나 문제는 그때부터였다. 구체적으로 내가 뭘 모르는 지를 모르니 무엇을 찾는지도 또 어떻게 찾는지도 몰랐다. 주변을 살펴보니 내 주위에 다양한 놀이로 인생을 살아가는 사람 자체가 적어서 우연히 발견하는 것도 생각보다 만만치 않았다. 그래서 더욱더 적극적으로 했던 것 같다. 책과 여러 서비스 그리고 나와는 다른 경험을 가진 사람의 얘기에 귀 기울이려는 노력을.


 몇 년이 지난 후 비슷한 상황을 또 마주했다. 다행인 건 그 순간 든 생각이 "아, 이제 뭐 하지? 친구들 불러서 술이나 마실까?"가 아니었단 거다. 당시 한 3개월 정도 푹 빠져있던 독립서점이 가장 먼저 떠올랐고 난 곧바로 홍대/연남동으로 향했다. 주인의 취향이 듬뿍 담긴 책들이 큐레이션 된 독립서점. 그때 그 잡지를 만난 거다. 거기 벽면 한 귀퉁이 전체가 잡지 코너였는데, 그중 하나가 디자인을 업으로 삼고 있는 사람들의 인생 얘기를 담고 있었다. 인터뷰 전반에 걸쳐 그런 관심과 취향이 만들어지기까지의 시작과 과정을 포함해 그 사람의 취향이 진하게 배어 있었다. '우와'했다. 인생은 한 번이라는 말뿐이 아닌, 자기가 생각하고 고민한 대로 살아가고 있는 모습에서 그 사람만의 취향을 느낀 거다.  


 며칠 후 평범한 일상 속에서 점심을 가볍게 먹은 후 산책 겸 근처 영풍문고에 들렀다. 매주 한두 번씩은 습관처럼 가는 산책코스다. 곧바로 잡지 코너로 돌진했다. 매월 마지막 주면 다음 달 잡지가 나온다. 오늘 발견한 잡지는 '뉴필로소퍼 창간호'.


 내게도 취향이라는 게 생기려는가보다. 꾸준히 주위를 기웃기웃하고 난 이게 왜 좋을까를 고민하는 과정 속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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