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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속한 시간이 지났습니다

자녀와 부모가 함께 성장할 수 있는 기회: 약속한 시간에 잘 종료하기

by 이싸라

초등학교 시절 전 누구보다 부지런한 어린이였습니다. 일요일 오전에만 말이죠. 평일에는 누가 흔들고 깨워도 일어나지 않던 저였습니다만 일요일만은 달랐습니다. 아침 7시만 되면 눈은 번쩍 떠집니다. 곧바로 TV 앞으로 기어갑니다. 디즈니와 프로레슬링(당시에는 WWF 지금은 WWE)이 절 기다리고 있으니깐요. 이 둘은 제게 알람시계였습니다. 그게 그렇게도 재밌었습니다. 그 철부지 어린애가 아무 도움도 받지 않고 혼자서 벌떡 일어날 정도였으니깐요.


일요일 아침 제 옆에 딸이 앉아 있습니다. 평일에는 항상 깨워줘야 하는 딸이 웬일인지 혼자서 일찍 일어났습니다. 아침밥도 먹기 전에 '동물의 숲(이하 동숲)'을 하고 있습니다. 딸의 표정을 보며 문득 예전 제 초등학교 시절을 떠올립니다. 지금의 딸 표정이 아마 제 표정이었을까요. 자기 섬을 꾸미는데 여념이 없습니다. 캐릭터도 꾸미는데 여념이 없습니다. 농사를 짓고 수확을 하는데 여념이 없습니다. 딸에게 동숲은 알람시계인가 봅니다.


주말에만 할 수 있는 이 게임을 위해 한 주를 살아온 걸까요? 딸은 동숲을 할 때면 행복에 겨워 날아갈 듯한 표정을 짓습니다. 한주를 열심히 보냈기에 딸에게 이건 작은 보상과 같습니다. 저도 아내도 모두 즐겁습니다. 왜냐고요? 저희는 더 자고 싶거든요. 딸의 간섭을 받지 않고 편안히 더 잘 수 있습니다. 딸은 일찍 일어나 동숲을 하고 싶습니다. 더군다나 저희의 간섭을 받지 않고 말이죠. 서로가 win-win 하는 순간입니다. 시작 전 저희가 얘기하는 건 그저 이 정도입니다. "언제까지 할 거야? 딸". 그럼 약속된 멘트가 곧바로 나옵니다. "음... 한 시간?". 그럼 이어서 저희도 준비된 멘트를 하죠. "좋아".


아이는 곧바로 조이콘을 들고 소파로 점프합니다. TV와 닌텐도 스위치를 켭니다. 능숙하게 동숲으로 들어가 몇 가지 세팅을 자기가 원하는 대로 바꿉니다. 캐릭터의 옷과 스티커 등을 그때그때 자기의 기분에 맞춰 바꿔주는 거죠. 이제 시작입니다. '빰빰빰빰 빠바밤, 빠바바바바바바" 배경음악이 나옵니다. 아이는 세상 밝은 표정을 지으며 게임을 시작합니다.


전 개인적으로 이런 RPG(역할 수행 게임)을 좋아하진 않습니다. 제 취향이 아니거든요. 캐릭터 하나를 계속 성장시키는데 시간이 좀 듭니다. 전 한 판이 독립적으로 빠르게 끝나는 게임을 더 선호합니다. 하지만 옆에서 딸의 플레이를 보면 이 게임 참 잘 만들었다는 생각이 들 때가 꽤 있습니다. 추가로 들어가는 비용이 없는 것도 참 좋습니다. 물론 확장팩(새로운 콘텐트가 가득 모인 일종의 대규모 업데이트)을 살 때는 돈이 듭니다. 그리고 친구들 섬에 놀러 가거나 꿈속의 콘텐트를 즐기기 위해서도 온라인 연결(4,900원/월)이 필요합니다. 하지만 요즘 모바일 게임에 거의 필수로 포함된 인앱결제(앱 내에서 콘텐트, 상품 또는 서비스 구매)가 여기엔 없습니다. 쉽게 말해 제가 즐기고 싶은 게임을 돈 주고 사기만 하면 특별히 돈 들어갈 일이 없습니다.


제 딸은 오늘도 열심히 게임 내에서 '삽질'을 합니다. 그렇게 획득한 게임 속 재화(Virtual Currency/ 게임머니)를 자기가 원하는 아이템으로 교환합니다. 멋진 뮤지엄도 짓습니다. 짓는데 돈이 필요합니다. 게임 내 은행에서 돈을 빌립니다. 잡아온 희귀 물고기를 이곳 뮤지엄에 전시합니다. 제 딸의 '삽질'이 느는 만큼 뮤지엄은 점점 볼거리로 넘칩니다. 농사도 열심히 짓습니다. 수확해 팝니다. 여기서 번 돈으로 얼마 전 은행에서 빌린 돈을 꾸준히 갚습니다. 그 과정에서 제게 자기가 잡아온 희귀한 물고기를 설명합니다. 누르면 자료 화면과 그 물고기에 대한 설명이 같이 나옵니다. 마치 '바다탐험대 옥토넛'의 마지막 장면과 흡사합니다. 아니 이런 교육적 자료 같으니라고. 코엑스와 제주 아쿠아리움에서 봤던 것이 여기 딸의 뮤지엄 안에 그대로 들어가는 중입니다. 이 순간 딸과 저는 둘 다 즐겁습니다.



웃으며 방긋 헤어진다는 건 연습이 필요한 일입니다.


그렇게 즐거운 시간은 정말이지 순식간에 지나갑니다. 약속한 1시간이 '훅'하고 지나갑니다. 시계를 보며 전 말합니다. "딸, 이제 곧 시간 다 돼가는데...". 딸은 일단 못 들은 척합니다. 아니 어쩌면 진짜 제 얘기가 들리지 않은지도 모르겠습니다. 전 한 번 더 얘기합니다. "딸, 이제 1시간 다 됐어. 이제 그만해야 되는데...". 이제야 딸이 대답합니다. "아빠, 조금만 더 하면 안 될까요?". 대답이라기보다는 요구사항입니다. 그렇게 보통 10분, 15분 혹은 하고 있는 '삽질'을 마칠 때까지 허락합니다.


약속된 시간이 또 흘렀습니다. 서로 간에 긴장감이 흐릅니다. 이번엔 제 목소리 톤이 좀 더 커집니다. 딸도 덩달아 커집니다. 대략 "이제 그만"과 "싫어. 주중에는 안 하잖아. 조금만 더 할 거야"가 몇 가지 다른 버전과 톤으로 왔다 갔다 합니다. 이제 저의 마지막 멘트가 시전 될 차례입니다. "약속 안 지킬 거면 앞으론 게임하지 마. 자기가 한 말도 안 지키고 너 뭐야. 엄마아빠한테 소리나 빽빽 지르고. 당장 꺼. 이제 게임 없어".


결국 현실 버전의 동숲이 등장합니다. 집안 곳곳이 동물의 세계입니다. 저희는 서로를 마주 보며 '으르렁'대며 소리 지르고 있습니다. 부모-자녀라는 새로운 캐릭터가 현실 속 동숲에 업데이트된 순간입니다. 요동치는 제 마음속의 화가 엉뚱한 곳에 다다릅니다. "역시 이래서 게임은 안돼. 몰입을 넘어 중독을 일으키는 나쁜 놈들. 거들떠보기도 싫어". 이렇게 불똥은 주변으로 튀는 건가 봅니다.



버럭 하면 손해 봅니다. 알고 있지만 또 버럭 합니다.


소아청소년정신과 김붕년 교수는 자녀를 기르는 데 있어 기질과 애착이 중요하다고 말합니다. 기질 형성은 어느 정도 유전적인 부분이 있습니다. 하지만 애착은 부모와의 관계와 기질의 상호작용을 통해 만들어진다고 합니다. 다음은 '10대 놀라운 뇌, 불안한 뇌, 아픈 뇌'에서 이 애착에 대해 그가 한 설명입니다.


애착은 부모가 제공하는 두 가지 양육 특성에 많이 좌우됩니다. '일관성'과 '안정감'입니다. 부모가 일관되게 정서적 안정감을 가지고 아이에게 애정과 지지를 표현할 때 아이와 '안정 애착(secure attachment)'을 맺게 됩니다. 만약 부모가 감정 기복에 따라 일관되지 않은 태도로 아이를 대하면, 아이는 부모와 '불안정 회피 애착(insecure avoidant attachment)'을 맺게 됩니다. 또는 부모가 불안정한 정서로 아이를 대하면, 아이는 부모에게서 '불안정 저항 애착(insecure resistant attachment)'을 맺게 됩니다. (p21)


돌아보면 저희 모두는 그저 감정을 쏟아낼 뿐이었습니다. 아이는 아이대로, 저는 저대로, 아내는 아내대로 말이죠. 같은 말이라도 '아'다르고 '어'다른 법인데, 목청껏 감정을 쏟았으니 결과는 뻔했습니다. 시간이 제법 흐른 지금은 다행히 많이 달라졌습니다. 위와 비슷한 상황은 대략 초등학교 3학년 무렵까지 벌어졌던 것 같습니다. 여러 시행착오와 대화를 통해 지금은 위와 같은 상황이 거의 일어나진 않습니다. 하지만 당시에는 어떻게 잘 그만둬야 하는지를 몰랐습니다. 비단 온라인게임뿐만이 아닙니다. 대부분의 놀이에서 위와 비슷한 상황이 반복됐습니다. 야외에서 뛰어놀 때 역시 예외는 없었습니다. 놀이터, 방방이, 롤러스케이트 등 놀이의 마지막 순간엔 크고 작은 스파크가 튀었습니다. 자기 전 소소하게 즐겼던 보드게임도 마찬가지입니다. 결국엔 잘 끝내지 못해 '버럭' 화내며 씩씩대며 잔 적이 많았습니다.


저희 부부는 꽤 오랫동안 이 문제에 대해 얘기를 나눠왔습니다. 그 과정에서 저희가 잘못했다고 느낀 공통점을 발견했고요. 대표적인 게 바로 '갑자기 버럭 소리 지르면서 화내기'입니다. 아이 입장에선 이 순간 저희가 진짜 무서운 동물처럼 느껴지지 않았을까요. 무서운 얼굴과 큰 소리로 "하지 마"라고 하는데 아이가 어떻게 이걸 고분고분 받아들일 수 있을까 말이죠. 이후로도 몇 차례 시행착오가 겪긴 했지만 저희는 한 가지에 집중했습니다. 불꽃이 터질 것 같은 그 순간 감정적으로 대응하지 않으려 말이죠. 너무 어려웠습니다. 그리고 지금도 사실 쉽지 않습니다. 하지만 그 효과는 확실했습니다. 놀랍게도 아이의 반응은 조금씩 달라졌습니다. 저희는 그저 뾰족해진 저희 감정을 조금이라도 뭉툭하게 하기 위해 노력했을 뿐이었습니다. 근데 아이는 저희와 한 약속을 지키려 노력했습니다. 저희는 아이가 보여준 그 노력에 대해 진심으로 칭찬했습니다. 기분 좋아진 아이는 전보다 더 약속을 잘 지키려 노력했습니다. 그렇게 아이도 저희도 성장하고 있었습니다.


앞으로도 아마 또 다른 문제가 계속 발생할 거라 생각합니다. 그럴 때 저도 모르게 새로운 불꽃이 제 속에서 터져 나올지도 모르겠고요. 하지만 이젠 압니다. 문제가 발생하는 그 순간이 바로 서로가 성장할 수 있는 소중한 순간이라는 것을요. 저희의 감정을 다스리는데 어느 정도 시행착오를 겪을지라도 잘 해결해 나갈 수 있을 거라 믿으니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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