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력으로 이겨야 재미도 배가 되는 법
재작년 새해 첫날 저희 가족은 집에서 가까운 몰(mall)에 들렀습니다. 다음날 출근해야 하는 저를 배려해 소소하게 놀자는 취지였죠. 몰 안에 있는 서점도 들르고 식사도 하며 즐거운 시간을 보냈습니다. 주차장으로 이동하던 중 딸이 뭔가 하나 발견합니다. 바로 토이저러스(ToysRus) 광고였습니다. "아빠, 잠깐만 구경하고 가면 안 돼요?" 어떻게 그냥 가겠습니까. 오늘이 바로 새해 첫날인데요.
딸은 토이저러스 안을 꼼꼼히 살핍니다. 뭔가 하나 꼭 사야 되겠다는 눈치였습니다. 이곳 저것 살피던 중 '세트(SET)'라는 보드게임을 선택했습니다. 이걸 번쩍 들며 제게 얘기를 겁니다. "아빠, 이거 친구들이랑 학원에서 같이 한적 있는데 정말 재밌었어. 우리 같이 하면 안 돼?" 어떻게 안 할 수가 있습니까. 오늘이 바로 새해 첫날인데요.
집에 돌아온 저희는 각자 해야 할 일을 먼저 마무리했습니다. 그리고 이 보드게임을 중앙에 두고 빙 둘러앉았습니다. 딸은 이 게임을 집에서 할 수 있다는 생각에 기분이 들떴습니다. 막 신이 나 제게 룰을 설명해 줍니다. 일단 바닥에 12장의 카드를 깝니다. 모두가 볼 수 있도록 앞면으로 말이죠. 세 장의 카드를 한 세트로 약속된 조합을 먼저 골라내면 됩니다. 승자가 그 카드를 가져가면 새로운 카드를 바닥에 깝니다. 약속된 조합은 이렇습니다. 총 4개의 속성(모양, 색깔, 개수와 음영)에 대해 모두 같거나 모두 다르면 조합이 됩니다. 모든 카드가 소진될 때까지 이 과정을 반복합니다. 그리고 최종 승자는 당연히 가장 많은 조합을 찾아내 카드를 갖고 있는 자가 됩니다. 카드를 무작위로 잘 섞었습니다. 딸이 해준 설명과 연습게임으로 룰을 대충 파악합니다. 너무 압살 하면 재미없겠죠. 아내도 딸도 적당히 이겨야 가정의 평화가 유지되는 법입니다. 제 속마음이 얘기합니다. "자, 그럼 적당히 좀 봐주면서 게임을 시작해 볼까?"
한 판 두 판 세 판 네 판... 이 게임을 먼저 경험했던 딸이 막 달립니다. Win, Win, Win, Win.... 오호라, 아내도 드디어 적응을 했나 봅니다. 순발력 있게 세트를 외치며 카드를 가져갑니다. 딸과 아내 앞에는 그렇게 카드가 쌓여 갑니다. 그런데 이게 웬일입니까. 바닥에 깔린 카드를 뚫어져라 봐도 도무지 제 눈에는 조합이 보이질 않습니다. 하나 보일라 하면 딸과 아내가 '세트'를 외치며 먼저 가져갑니다. 그렇게 열몇 판이 흘렀고, 정신없이 한 게임이 끝났습니다. 결과는 볼 것도 없이 딸의 압승입니다. 두 번째 게임을 시작합니다. 전 좀 전보다 더 집중해 바닥의 카드를 뚫어져라 쳐다봅니다. 쳐다보는 제 눈앞에서 딸과 아내는 서로 '세트'를 외칩니다. 그 둘은 주거니 받거니 작은 승리를 쟁취하고 있습니다. 두 번째 게임의 최종 결과, 전 딱 한 판을 이겼을 뿐입니다. 딸과 아내는 지금껏 한 번도 경험하지 못한 짜릿함으로 환호를 지릅니다. 전 망연자실 머리를 감쌀 뿐입니다. 지금까지 가족과 함께 한 그 어떤 게임도 전 져 본 적 없었습니다.
백여 가지 가까이 되는 마리오파티의 미니 게임도, 저스트댄스의 춤추는 게임도, 수박게임도 게임이라고 붙은 모든 종목에서 저의 승리는 지금껏 당연한 거였습니다. 딸이 7살 됐을 무렵 가르쳤던 '훌라' 역시 아직은 제가 더 잘합니다. 딸의 최애(崔愛) 놀이 중 하나인 '원카드' 조차 진실의 껍데기를 한 꺼풀 벗겨내면 사실 제가 더 잘합니다. 그런데 이 게임은 지금까지와는 달랐습니다. 너무나도 극명한 딸과의 실력차이로 전 어떻게 할 엄두조차 나지 않았습니다. 딸과 아내는 입이 귀에 걸릴 정도로 재밌다는 표정을 연신 짓습니다. 약이 오릅니다. '한 판 더'를 연신 외치는 그들을 보며 전 이렇게 반항합니다. "아, 재미없어. 너무 어려워. 나 이 게임 좀 더 공부하고 다시 할 거야".
피드백과 보상이 있어야 게임은 재밌습니다.
게임은 재밌다고 합니다. 근데 가만히 보면 게임 그 자체가 재밌다기보다는 그 과정에서 얻게 되는 피드백과 보상으로 인해 재미를 느끼는 게 더 큽니다. 김경일 교수는 '마음의 지혜'에서 게임하는 뇌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게임도 도박과 비슷한 메커니즘으로 진행될 것 같지만 게임하는 사람들의 뇌를 관찰하면 의외로 쾌감중추는 고요합니다. 별로 즐겁지 않다는 이야기지요. 반면 인지기능은 엄청나게 활동하는 데 이는 뇌가 몰입하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p357)
그 시절 추억의 게임을 하는 동안에도 우리 뇌는 그다지 즐거워하지 않았습니다. 피드백이 있기에 모든 행위가 가능했던 거예요. 하지만 피드백 또한 경험이 있어야 탄력을 받을 수 있습니다. (p358)
딸과 아내와 함께한 '세트'는 제게 너무 어렵습니다. 이런 게임을 예전에 해본 적도 없습니다. 셀 수 없이 집니다. 그러니 전 재미를 느끼려야 느낄 수가 없습니다. 긍정적인 피드백이 하나도 없으니깐요. 둘은 제게 피드백을 줄 생각이 전혀 없어 보입니다. 조합을 발견할 수 있도록 기회를 줘야 저 역시 소소한 피드백을 얻어 계속할 수 있을 텐데 말이에요.
딸과 함께 오랫동안 재미있게 놀기 위해 전 제가 평소에 즐기는 놀이 중 일부를 딸에게 알려줍니다. 이때 항상 제가 조심하는 부분이 있습니다. 처음 하는 딸에게 당연히 그 놀이는 어렵습니다. 더군다나 아직은 어리기에 실력이 원하는 만큼 팍팍 늘지도 않습니다. 시간이 걸립니다. 그래서 전 딸이 그 놀이에 익숙해지고 실력이 늘 때까지 기다려줍니다. 딸에 수준에 맞춰 제 플레이 수준을 조정하는 거죠. 그렇지 않고 처음부터 압도하면 딸은 지레 겁먹고 도망가버립니다. 재미없는 거죠. 이번 판에 아슬아슬하게 져야 다음 판의 승리를 기약할 수 있는 법입니다. 그래야 집중해서 또 할 수 있으니깐요. 그래야 재미가 있으니깐요. 그래야 서로가 계속 즐길 수 있으니깐요.
오늘부터 저는 특훈입니다. 목마른 자가 우물을 팔 수밖에요. 딸과 아내를 시원하게 꺾는 그 재미를 느껴봐야 합니다. 게임도 놀이도 공부도 그리고 인생도, 뭔가 잘하는 순간이 있어야 즐거운 법이니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