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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수연 Nov 20. 2017

재능에 대하여

예체능에 조금이라도 소질이 있는 사람들은 대체적으로 십 대에서 이십 대 사이에 그 사실을 깨닫는 듯하다. 나 같은 경우, 초등학교 저학년 때 십분 만에 써제긴 시가 최우수상을 받았던 것을 계기로 글쓰기에 대해 약간의 자부심을 갖게 되었다. 하늘/파아란 하늘/바다 빛 물감을 펼쳐놓은 듯 파아란 하늘 뭐 이런 식의 패턴을 색깔만 바꿔가며 반복했던 시였는데, 무슨 생각으로 '파란'이 아니라 '파아란'을 선택했는지 모르겠지만 내가 볼 땐 저 '파아란'이 굉장히 한몫을 한 것 같다. 전교생 앞에서 상 받을 일도 별로 없던 내가 하필이면 저 상을 받아야 하는 날 눈병이 나는 바람에 반장이 대리 수상을 했던 씁쓸한 기억도 있지만, 그보다 더 선명한 기억은 시를 제출하고 나서 며칠이 지나 담임 선생님이 나를 불러다가 했던 말이었다. "수연아 너, 이 시 어디서 베낀 거지?" 지금이라면 '당신의 교사 자질 여부' 대한 글을 한 바닥 더 써서 그녀의 주머니에 곱게 넣어주었을텐데. 하지만 열 살 안팎의 나는 '뭐야, 이거 지금 나 천재라는 소린가?'하며 엄마에게 몇 번이고 자랑을 했더랬다. 


나이를 한참 더 먹어 이십대 중반이 되어서도 나는 칭찬에 춤추는 고래였다. 대학 마지막 학기 중 졸업 앨범에 넣을 자작곡을 학과장 교수님께 확인받는 과정에서 일어난 일이다. 현대 음악 전공자들은 누구나 미디ㅡ실제 악기를 녹음하거나 가상 악기로 작곡을 하는 컴퓨터 프로그램ㅡ수업을 필수로 들어야 하는데 나는 과제를 제출해야 할 때마다 미어터지는 미디실이 너무 싫어서 당시 가지고 있던 백만 원도 채 안 되는 전재산을 털어 싸구려 장비들을 마련해 버렸다. 이십만 원짜리 오디오 인터페이스, 몇 만 원짜리 마이크, 삼십만 원도 채 안 하던 마스터 키보드를 고생해서 집 컴퓨터에 연결하고 나니 음질은 후질지언정 커피를 마시며 안락하고 여유롭게 과제를 할 수 있는 환경이 완성되었다. 그리고 그 환경에서 얼렁뚱땅 작업한 결과물이 졸업 앨범 자작곡이었다. 이름만 대면 알만한 유명한 기타리스트인 교수님이 너 이거 누가 도와줬니,라고 물었을 때 나는 제가 혼자 다 했어요! 혼자요! 라고 빽빽거렸다. 그리고 며칠간을 아무래도 보컬보다 작곡에 더 재능이 있는 것 같은데 세부 전공을 바꿔서 편입을 해야 하나, 쓸데없는 고민을 하기도 했다.


내가 글쓰기에도, 음악에도 엄청난 천재가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는 데에 긴 시간이 필요치는 않았다. 문학 세계에도 음악 세계에도 천재들이 수두룩한 세상이었다. 티브이를 켜면 완성된 싱어송 라이터들이 끊임없이 등장했고 '이런 문장을 구사하는 건 인간으로서 반칙이다'싶은 필력의 작가들 또한 넘쳐났다. 그런 이들을 마주할 때마다 나는 종종 풀 죽은 강아지 같은 모양새가 되었다. 갑자기 지구는 왜 이렇게 커보이는 거람. 하지만 지난 시간 내가 들었던 칭찬들이 씨앗에 대한 격려라는 사실은 분명했다. 당시의 나는 천재성을 운운하며 헛물을 켰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그것들은 너 좋은 씨앗을 가지고 있구나. 오래 공들이고 노력하면 큰 나무로 키울 수 있겠다 하는 시작하는 재능에 대한 박수갈채 정도였던 거다. 이러저러한 과정들을 겪었지만 천재는 아니었던 지금의 나는 음악으로 입에 풀칠할 만큼의 밥벌이를 하며 여전히 '글쓰기'라는 나무를 키워나가고 있다. 지금쯤이라면 키가 십오 센티미터 가량 되는 묘목 정도 된 걸까. 키 큰 플라타너스 나무는 너무 까마득하지만 꾸준히 물을 주면 어른 나무와 조금 닮아지긴 하겠지 싶은 마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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