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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수연 Dec 13. 2017

시력 0.5

나이는 모두가 공평하게 먹는거니까 

십여 년 전부터 0.3에서 0.5 사이의 시력을 유지하고 있다. 0.5 안팎의 시력이란 굉장히 애매한 것이어서 안경을 끼지 않아도 일상생활에 별 지장은 없지만 벽에 걸린 카페의 메뉴판이나 칠판에 적힌 강의 노트 같은 것은 잘 읽을 수가 없다. 라식 같은 의료기술의 힘을 빌릴 만큼 절망적인 건 아니지만 대안책이 필요하긴 하다. 대개 안경을 가지고 다니며 필요할 때만 꺼내서 쓰고 그 상황이 끝나면 다시 넣어두곤 하는데 이상하게도 꼭 필요한 날에는 안경을 두고 나온다. 얼굴을 잔뜩 찌푸리며 뭔가를 보는 게 진절머리가 나면 '렌즈를 사야겠어'하고 결심을 하기도 하지만 곧 그만둔다. 관리를 제대로 못해서 잘 마른 북어포처럼 말려버린 렌즈가 수두룩하다.


근래에는 점점 더 눈이 안 좋아지고 있다. 일정 거리 안에 사람이 들어와도 얼굴을 인식할 수 없게 되어버렸다. '안녕하세요'를 해야 하는 사람인지 '어, 안녕'을 해야 하는 사람인지 구분할 수 없을 때의 곤란함이란 사회생활에 꽤 큰 불편함으로 다가온다. 그보다 더 크게 느껴지는 건 핸드폰 메시지다. 아침에 잠에서 깨자마자 핸드폰을 들여다 보면 글자를 읽을 수가 없다. 잘 안 보이는 게 아니라 그냥 안 보여서 어디가 글자고 어디가 공백인지도 모르겠다. 한참을 끔뻑거리고 미간을 삼지창처럼 접어야 겨우 초점이 맞는다. 아침 댓바람부터 참 슬픈 일이다.


왜 할아버지 할머니들은 목소리가 저리 크실까, 생각해 본 적이 있다. 답은 나에게서 찾을 수 있었다. 코감기가 된통 걸려서 귀까지 먹먹하던 며칠, '좀 작게 말해'라는 말을 몇 번이나 들었다. 내 귀가 잘 안 들리니 그런 거였다. 모니터 스피커를 정상 레벨보다 작게 설정해 두면 노래하는 사람은 점점 목소리가 커질 수밖에 없다. 교회에서 새해 선물로 돋보기 안경을 받아왔다며 '내가 벌써 돋보기 써야 하는 어르신이야?' 하고 서러워하던 엄마 역시 나에게 한쪽 다리가 부러진 돋보기를 내밀었다. '너 그 공예할 때 쓰는 접착제 있잖니, 그걸로 이거 좀 붙여봐.'


나이를 먹으면 입출력 기능들이 퇴화한다. 안타까운 일이다. 세상을 더 분명하게 보고 싶고 선명하게 듣고 싶은 마음은 나이와 상관없이 모두가 같을 텐데. 나도 몇십 년 더 나이를 먹고 누군가 '이거 보청기에요'하고 선물을 내민다면 고마운 마음과 서러운 마음이 동시에 들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나는 서러운 마음은 얼른 집어넣고 보청기든 돋보기든 더 삶을 풍성하게 누릴 수 있게 해주는 모든 것을 동원해서 세상을 오래오래 느끼고 살 생각이다. 나이는 모두가 공평하게 먹는 거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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