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지수연 Dec 24. 2018

그녀의 마음

행복한 어른이 되었습니다.

종로에 있는 아담한 카페에서 커피를 만들어 나르던 시절이 있었다. 십여 년 전의 이야기다.


사장님은 비쩍 마른 몸매에 늘 화려한 옷을 입는 중년 여자였다. 그녀는 가게에 지인을 데려와 영어로 유창하게 대화를 하는 일이 많았고 사람들에게 건네는 톤 높은 말투와 독특한 스타일링으로 매순간 시선을 끄는 사람이었다. 일개 아르바이트생인 나는 그녀에 대해 자세히 알 수 없었으나 몇 가지는 분명했다. 몇몇 매니저와 아르바이트생들이 그녀를 싫어한다는 사실. 그리고 그녀가 이스라엘에서 오래 거주하여 한국에서 나고 자란 사람들과는 조금 다른 생각을 가지고 살아간다는 사실이었다.


나는 그녀가 싫지 않았다. 유창하게 영어를 하는 것이 생색처럼 느껴지지도 않았다. 그녀와 단둘이 근무를 하는 날에는 그녀에게 낯선 땅에서 벌어지는 사소하고 특별한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그 이야기에는 언제나 사람 사는 냄새가 묻어있었고 나는 그 시간이 좋았다. 다정했지만 과하지 않았고 공과사가 분명한 사람이었다. 누군가는 그 모습을 보고 '인정머리가 없다'며 손가락질했지만, 나는 외려 그녀를 손가락질하는 이에게서 한 발 멀어졌다.

 


일 년 즈음이 흘러 함께한 시간을 마무리하던 날, 아쉬운 마음에 괜한 앞치마를 꾸깃거리던 나를 향해 그녀가 빼꼼 손짓을 했다. 우리는 구석진 손님용 테이블에 마주 보고 앉았다. 

「같이 일하는 동안 참 즐거웠는데 아쉽다. 학교에 가야 한다고 했던 얘기가 기억나서, 학자금 대출을 받아야 할 것 같다고 했던 얘기가 기억나서 주는 거니까 부담 없이 받아. 많이 넣지도 않았으니까, 마음을 기억해 주면 좋겠어. 밥이라도 잘 챙겨 먹으라고. 어린 나이니까 많이 배우고 많이 먹어.」 

사장님이 내민 봉투에는 몇 마디 문장과 함께 빳빳한 만 원짜리 열 장이 곱게 포개어져 있었다. 우리는 손을 마주 잡고 웃었다. 마음이 따스하여 눈물은 나지 않았다.


그 날 이후로 그녀를 다시 만난 적은 없다. 이십 대의 내 삶은 파란만장했고 눈곱만큼의 여유도 없었기에 나는 그녀를 그 카페를 그곳의 모든 인연들을 새까맣게 잊고 살았다. 그리고 그곳은 몇 해 전 문을 닫았다.


크리스마스가 가까워지면, 간혹 그때의 기억이 몽글몽글 떠오른다. 스무 살 혹은 스물 댓살의 이들이 옹기종기 모여 앉아 트리를 꾸미던 곳. 손님이 핫초코를 주문하면 내 몫과 매니저의 몫까지 세 잔을 만들던 주방. 그리고 사장님의 꼬불거렸던 머리카락. 이제는 마주해도 서로를 알아보지 못할 만큼 흐릿한 기억이지만, 사장님이 준 십만 원으로 열심히 밥을 사 먹은 나는 결국 지금의 내가 되었다. 누구보다 나를 사랑하는 내가 되었다. 





매거진의 이전글 시력 0.5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