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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수연 Dec 25. 2017

El amor todo lo puede


H가 처음부터 특별했던 건 아니었다.

아무런 감정이 없을 때에는 그에 대한 것이 전혀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연인이 된 후 어느 날 '오늘 입은 코트 참 예쁘다.' 칭찬을 하니 H는 절레절레 고개를 저으며 웃었다. '내가 오늘로 이걸 몇 번째 입었더라.' 나는 열댓 번도 더 입었다는 그의 코트를 늘 알아보지 못했다. 정말로 기억이 나질 않는 데다 워낙 눈썰미도 없는 사람인지라 변명의 여지가 없었다. 나는 H의 카키색의 트렌치코트 밑자락에 민망함을 감추고 재빠르게 다른 화제를 꺼냈다.




H는 내가 수업을 하는 학원의 성인반 학생이었다. 15년간 수업을 하며 숱한 사람들이 스쳐갔다. 비슷한 연령대가 대부분인지라 친한 지인으로 발전한 이들도 있었다. 하지만 소수였다. 대개의 관계는 주어진 역할을 수료함으로 끝났다. 단순히 선생님과 학생이었던 시기에 H가 어떤 모습이었는지 나는 확실히 기억하지 못한다. 기억할 필요가 없었다. 내가 신경 써야 할 것은 상대의 수업 이해와 적용 여부였고 그 외의 것에 에너지를 쓰는 것은 불필요했다.


2017년, 겨울. 수업이 끝날 때까지 학원에 남아있던 H와 (알고 보니 계획적이었던) 퇴근을 함께 했다. 해가 지기 전의 이른 주말 퇴근이었다. 업무적으로 만나던 장소를 벗어나 낯선 길을 걸었다. 장난치며 커피를 주문했고 사적인 이야기들을 나눴다. 나는 인생 선배에게나 할 법한 이야기를 H에게 늘어놓았고 그는 조근조근 대답했다. 가벼운 농담에 잘 웃었고 질문에 대한 답을 신중하게 골랐다. 그제야 조금씩 그가 눈에 들어왔다. 이 친구 얼굴이 참 갸름하구나, 하고.



스쳐가는 관계에서 벗어난 H의 모습은 새로웠다. 배우처럼 잘 생긴 얼굴은 아니지만 축 처진 눈꼬리와 높은 코가, 꼬불꼬불한 머리카락이 예뻤다. 늘 단정하게 옷을 입는 모습과 무엇이든 끈기 있게 하는 모습도 보기에 좋았다. 하지만 그보다 더한 매력은 함께 하는 시간에 비례하여 두드러졌다. 갈등은 적은 편이었으나 둘 다 주관이 뚜렷하고 말을 잘하는 사람들인지라 차분한 갈등만으로 큰 불을 낼 수 있었다. 서로 다른 가치관을 마주할 때마다 나는 그럴듯한 말로 서로를 찌르지 않을까 염려했다. 하지만 우리는 조율이 가능한 관계였다.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은 두 사람이 가족이 되는 데에 꼭 필요한 요건이 충족되었다.


다른 가치관으로 상대의 마음이 상하면 부드러운 말투로 말했다. 혼자 있는 시간에 상대의 관점을 곱씹어보면 결과는 대부분 '그래, 그럴 수도 있겠다'가 되었다. 누군가에게 더 특화된 분야의 갈등이라면 납득할 만한 이해관계를 거쳐 한쪽으로 의견을 모았다. 아직 완벽한 조율이 되지 않았다고 생각되는 일에 대해서는 큰 틀에 대해서만 이야기하며 서로에게 더 시간을 주었다. 타인과의 관계에서 나는 어땠나 돌아봤다. 시도가 실패한 경우도 있었지만 시도조차 하지 못한 경우도 있었다. 서로의 이성으로는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부분이기에 그랬을 테다. 누구의 잘못은 아니다. 그저 그렇게 되었을 뿐이다. 솔직히 그 수많은 다름이 순순히 받아들여지는 것이 더 이상한 일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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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시다 슈이치의 소설 '7월 24일의 거리'에서 여주인공 혼다는 누군가에게 '당신이 사랑하는 그 남자의 얼굴을 제대로 보고 있느냐'는 질문을 받는다. 의미를 잘 이해하지 못하고 버벅거리는 주인공에게 질문자는 다시 묻는다.

'내내 좋아했던 그 사람이 아니라,

지금 좋아하는 그 사람의 얼굴.

현재를 살고 있는 그 사람의 얼굴을 제대로 알고 있느냐'고.

시간이 흘러 관계가 쇠퇴하면 과거의 기억을 붙들게 된다. 사랑이라는 감정을 생생하게 느끼던 시절의 상대를 그리워하게 된다. 관계의 조율과 성장을 포기하면 자연스럽게 마주하게 되는 흐름이다. 그런 관계는 현재를 직시하지 못하게 한다. 내가 '지금' 사랑하고 있는 상대가 과거의 존재로 대체되는 것은 숨죽여 일어나는 일이기에 더욱 쓸쓸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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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년 전, 여전히 머리카락이 꼬불꼬불한 H가 크리스마스 선물이라며 직접 글귀를 새긴 다이어리를 내밀었다. 빨간색 다이어리의 앞면에는 내 이름이, 뒷면에는 스페인어 문장이 한 줄 적혀 있었다.

El amor todo lo puede.

사랑은 모든 것을 가능케 한다. 

내가 예전에 연재한 글을 보다가 '사랑이 모든 것을 이긴다'는 문장이 마음에 들어 비슷하게 적었다고 했다. 마음이 울컥했다. 다른 사람과는 불가능했으나 지금은 가능하게 된 이 관계의 비결임과 동시에 우리가 평생을 쥐고 가야 할 문장이었다. 쉽지 않으나 고결한 목표이니 두 사람이 손을 잡고 차근차근 오르는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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