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는 말했다. 죽음이란 모두에게 공평한 것이라고 아무리 되새겨도 사실은 모두가 죽지 않을 것처럼 살아간다고. 그럴 수밖에 없다고. 시간을 들여 곰곰이 생각해보면 나의 죽음이라는 건 남의 나라 이야기처럼 멀게만 느껴진다고 했다. '할아버지가 세상을 떠나고 벌써 삼십여 년이 지났지만 엄마는 아직도 모르겠어. 그저 눈에 보이지 않고 목소리를 들을 수 없을 뿐이야' 했다. 이십여 년 전, 할머니 집 벽에 덩그러니 걸려있던 할아버지의 흑백 사진이 떠올랐다. 어디에 내놓아도 지지 않을 것처럼 강단 있어 보이던 얼굴이.
사그라진 몇몇 이들의 이름이 맴돌았다. 꽤나 좋아했던 친구와 가끔 안부를 묻던 친구, 몇몇 어른, 가족이나 다름없었던 강아지 두 마리. 살았을 적 가장 예쁘게 웃었던 장면과 비현실적이기 짝이 없던 마지막 순간들이 스크린처럼 허공에 펼쳐졌다. 형제 같던 친구를 잃은 지인 하나는 그이가 떠난 지 일 년이 되었을 무렵 말했다. '아직도 실감이 나질 않아. 가끔은 친구들이 모이면 어 걔 왜 안 왔지 생각하다가 아차 하게 돼. 지금도 여전히 그래.' 덤덤히 말하는 그의 얼굴이 엄마의 얼굴과 겹쳐져 묘한 기분이 들었다.
살아가며 부끄러웠던 일을 낱낱이 적어내라면 백지가 먹지가 될 만큼 빽빽한 이야기가 등장하겠지만, 개중에서도 심오하게 부끄러웠던 일은 죽음에 대한 언급이었다. 이삼십 대의 몇몇 이들이 모이는 자리였고 누군가의 물음에 나는 답했다. "죽음이 두렵지는 않아요. 제가 두려운 건 남겨진 이들에 대한 염려뿐이에요." 테이블 너머에 앉아있던 다른 이는 고개를 저었다. 자신은 그렇지 않다고. 여전히 죽음이 두렵다고 했다. 확고한 종교적 신념 같은 것을 떠나서 알 수 없는 세계에 대한 불안감 같은 것이 늘 도사리고 있다며 음울한 표정을 지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우습게도 나는 죽음이 두렵지 않았던 적이 없었다. 죽음이 두렵지 않다, 말할 수 있었던 이유는 그저 나의 죽음을 상상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인간이 인간을 죽이고, 인간이 만들어놓은 기계와 문명이 인간을 죽이고, 비상식적이고 비논리적인 이유들로 수많은 목숨이 거품처럼 사라지는 세상이지만 엄마의 말처럼 그 모든 죽음은 슬픈 추상일 뿐. 나는 기어코 나의 죽음을 상상할 수 없다.
타인의 죽음을 통해 자신의 죽음을 마주하게 되었다는 이들의 이야기를 들었다. 살아 움직이는 팔다리를 끌어안은 채 나의 죽음을 생생히 떠올리는 일. 그런 건 실재할 수 없다 생각했는데 그렇지 않다니 그저 고개를 끄덕끄덕 하는 수밖에 없었다. 나는 잘 모르겠다. 결국은 내 삶의 끝자락에 닿을 때까지 언제까지고 죽음은 나에게 '부재'일 수밖에 없을 것만 같다. 견딜 수 없는 부재. 만질 수 없음에, 이야기를 나눌 수 없음에, 함께 밥을 먹고 눈을 마주칠 수 없음에서 오는 슬픔. 그리하여 끝끝내 나의 죽음은 미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