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에게는 이유를 거슬러 오르려는 습성이 있는 게 분명하다. 주제에 대해 논할 때도 그렇지만 인간을 파악하려 할 때는 유별나게 더욱 그렇다.
길리언 플립의 소설「나를 찾아줘」의 여주인공 에이미는 대단한 부모를 두었다. 심리학 석사 학위를 가진 그들은 모든 것을 자신의 선구적 해석에 빗대어 이해하기를 즐겼다. 딸과 사위를 앉혀둔 식사자리. 그들은 체리파이와 체리코블러를 먹지 않는 사위를 인습 타파주의자라 부르며 이렇게 말한다. '부모의 이혼 때문에 그렇군요. 모든 소박한 음식, 가족들이 함께 먹는 디저트 같은 음식은 당신에게 나쁜 기억일 테니까요.' 사위 닉은 그들이 자신을 위해 사용한 (불필요한) 에너지는 아주 바보 같고 다정한 일이었다 말한다. 그 정도면 꽤 너그러운 반응이다. 나라면 으악 소리를 질렀을 것이다.
어느 날 지인이 말했다. '마음이 너무 불안해서 견딜 수가 없었어. 뭐라도 하지 않으면 미쳐버릴 것 같더라. 그래서 지나가는 사람에게 말을 걸었어. 연락처 좀 알려달라고.' 그랬더니 그 사람이 연락처를 줬단다. 아니, 자고로 이야기에는 개연성이라는 게 있어야 하는 법인데 이게 무슨 맥락인가. 나는 어이없는 전개에 귀를 후벼팠지만 뜬금없기로 둘째가라면 서러울 나의 지인은 꽤나 진지했다. 그녀는 상대의 연락처를 채집함으로 인해 약간의 성취감과 위로를 얻었고 그로 인해 불안의 다급한 불을 껐다고 했다. 그리고 정작 상대방에게는 아주 오랜 시간 연락을 하지 않았다. 그러니까 목적은 순수하게 본인의 안녕이었던 것이다.
불안에 대한 글을 목적 없이 읽고 쓰다 보면 인간의 선천적 씨앗을 자주 마주하게 된다. 나는 성악설을 분명하게 지지하는 사람으로서 인간에게는 공감과 불안이라는 씨앗이 기본 탑재되어 있다고 믿는다. 잘 자란 공감은 좋은 열매를 맺는다. 인간을 인간으로서 빛나게 하는 귀한 열매들이다. 하지만 슬프게도 공감은 스스로 자라나는 법이 없다. 꾸준히 마음을 쏟아 키워야 하며 어린아이와 어린 동물들처럼 손이 간다. 반면 불안은 생존력이 강하다. 물과 정성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그저 자란다. 숨이 끊어지는 순간까지 자란다. 그것은 질투와 자기비하, 열등감 등의 씨를 퍼트리다가 끝내는 학대나 죽음에 닿기도 한다.
차이는 자가 성장 장치의 유무다. 불안은 먹이가 필요 없으며 공감은 먹이가 필요하다는 점. 불안은 스스로 자라지만 공감은 땀을 내어 키워야 한다는 것. 그렇다면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단순하다. 공감을 키워나가는 일. 불안을 잘라내는 일. 그리고 그것을 반복하려는 의지. 왜 인간은 쉽게 위축되며 젖은 빨래처럼 늘어지는 일을 반복하는 것일까 고민했지만 답은 간단했다. 당장 해야 할 일은 거대한 가위를 들고 마음속으로 들어가 철걱 철걱 잎을 잘라내는 것이다. (평소보다 이른 아침을 보내고 아베 피에르의 단순한 기쁨을 읽고 가족의 선물을 사고 맛있는 식사를 하자.) 그러면 모르는 이의 연락처를 받은 지인처럼 안도감이 스며들 것이다. 하지만 잎의 뿌리는 여전히 거기에 남아 계속해서 자란다. 불안을 뿌리째 뽑아내는 일은 불가능하다. 우리는 삶을 살 것이고 다시 또 불안할 것이다. 그러면 다시 잎을 자르자. 단순한 반복, 또 반복.
앞서 소설「나를 찾아줘」의 일부분을 이야기했다. 나는 이유를 거슬러 오르려는 인간의 습성을 존경하지만 한편으로는 넌더리를 낸다. 사실 거북한 것은 자신이 알고 있는 지식으로 세상의 모든 면을 간파할 수 있으리라는 인간의 오만함이다. 불안의 원인은 누구도 모른다. 거기에 명확한 정답이 있었다면 누구도 다자이 오사무의 소설을 활자로 찍을 생각을 하지 않았을 것이다. 불안의 일시적 해결 방안은 정기적 벌목. 근본적 해결 방안은 없다. 중요한 것은 그 마음을 위로하고 다독이되 이름을 붙이지 않는 것이다. 선구자적 해석론과 친밀해진다면 우리는 에이미의 부모와 다를 바 없는 사람이 된다. 닉이 체리파이와 체리코블러를 싫어한 이유는 이혼에 대한 트라우마 때문이 아니었다. 솔직히 닉은 그저 체리가 싫을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