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렇다. 얼은 아주 다정한 말투로 아주 무거운 단어를 말하는 사람이다. 먹고 살기가 힘겨워 발버둥을 칠 때에도 꿈을 향해 나아가는 일에 지쳐 나가떨어질 때에도 그의 나침반은 본질을 가리킨다. 그 반복되는 이야기에 기어코 홀리고야 만 것인지, 이제는 마음이 혼란한 순간마다 나 역시 본질을 읊는다.
얼은 돈을 다루는 일을 한다. 평일 새벽에도 토요일 저녁에도 회의 자리에 모여 앉아 본질을 논한다. 자금의 규모가 크고 출처가 복잡할수록 재빠르게 머리를 굴려야 하는 일이다. 무엇이 숨겨져 있는가. 무엇이 우리의 눈을 돌리는가. 진짜 문제점은 어디에 있는가. 우리는 그것을 어떻게 처리해낼 수 있는가. 그런 직업 정신은 일상 가운데에도 딸려온다. 아니, 본질을 찾는 이어서 그런 직업을 가진 것일지도 모르지만 아무래도 좋다. 나는 그 본질 타령을 아주 좋아한다. 다른 휘황찬란한 이야기보다 위안이 된다. 본질을 향하라는 그 고리타분한 이야기에는 진정한 본질이 담겨있다.
프랑스의 사상가 사르트르는 대표적인 실존주의 철학가이다. 그는 인간이란 존재는 그 어떤 본질도 가지고 있지 않으며 결국 인간이 추구해야 하는 방향은 자유와 책임이라 정의했다. 자유가 목적이 되는 삶에 대하여 논하자면 나는 그 과정에서 세상에 벌어질 일과 그것을 위해 인간이 이용하게 될 수단을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그 모든 과정 속에 '더 나은 방향'이 진정으로 존재할 수 있을까. 나는 유신론적 관점에서 인간에게 자유란 삶의 본질을 추구하는 도구로서 허용된 가치라 여긴다. 자유는 어떠한 방식으로도 목적이 될 수 없다. 삶의 종착지에 존재하는 것은 참된 것이어야 하며 수없이 언급되어 너절한 것이어야 한다.
그래서 그 너절한 것이 도대체 무엇인가 하면 .. 내가 어떻게 알겠는가? 본질을 찾는 일은 간단치 않다. 무형의 진리를 찾아내는 일은 무엇이든 그렇다. 그렇다면 반대로 본질이 아닌 것을 찾아보는 것이다. 공식은 간단하다. 우리를 고달프게 하는 대개의 것은 본질이 아니다. 타인의 방해로 인해 원하는 것을 얻지 못했다. 타인은 본질이 아니다. 비상식적인 가족으로 인해 삶이 고달프다. 비상식적인 가족은 본질이 아니다. 꾸준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성취에 실패했다. 탓을 돌릴만한 다른 어떤 것은 본질이 아니다. 그럴듯한 대개의 것은 전부 본질이 아니다. 안타깝지만 시선을 반대로 돌려야 보이는 것이 본질이다. 그러니까 본질은 나 자신, 결국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이 본질인 것이다. 세상이 내 뜻대로 되지 않는 것은 세상의 본질이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를 보는 것이 나의 본질. 객관적 시비를 떠나 나 자신을 들여다보는 것. 그것이 본질이다.
사르트르의 자유주의에 대해 많은 사람들이 고개를 갸웃하는 것은 그것이 공존 불가의 법칙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세상의 본질과 인간의 본질은 공존한다. 그것이 각자에 충실할 때 우리는 양방의 성장이 가능하다.
글을 쓰기 싫었던 순간이 있었다. 사실은 아주 많았다. 매 순간 이유는 넉넉했다. 발등에 불 떨어지는 일들이 빼곡한데 글 좀 안 쓴다고 어디가 덧나는 것은 아니었다. 사랑을 거부하는 순간에도 도전을 포기하는 순간에도 이유는 차고 넘쳤다. 글이 다 뭐고 사랑이 다 뭔가. 모든 게 지긋지긋했다.
단골 카페에서 얼과 마주 앉은 어느 날, 이러저러한 이유로 글을 쓰지 않겠다 선언했다. 얼은 미동도 없이 앙버터를 자르며 대답했다. 휘둘리지 마 수연아. 본질을 봐야지. 어휴 저 놈의 본질. 입이 한 뼘쯤 나온 채로 내가 물었다. 그래서 본질이 뭔데. 그가 웃으며 대답했다.
'본질은 '해야 하는 일을 그냥 하는' 거지.
곁다리에 속지 않고 두 발로 걷는 방법을 터득하는 거지.
객관적이라는 이름표를 붙여가며 탓을 돌리던 것에게서 등을 돌려, 나 자신을 똑바로 보는 거지.'
얼이 잘라준 앙버터는 아주 꿀맛이었지만 이어지는 이야기는 달콤하지 않았다. 그래서 나는 그 시간이 좋았다. 끝내 나는 웃었다. 이게 바로 내가 본질론을 좋아하는 이유다. 본질은 앙버터가 아니지만 견딜만한 가치를 지닌 씁쓸함이다. 솔직히 말하자면 마주한다면 어떻게 해서든 견뎌내는 편이 좋다. 그것의 가치는 시간이 흐른 후 필연적으로 깨닫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