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의와 무례 사이

돕는 이들의 자리는 두 번째 줄

by 지수연


등이 작은 여자와 커다란 개의 꼬리, 역주행하는 에스컬레이터가 한 시야에 잡혔다. 그들은 올라오는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내려가려는 듯 보였고 형광색 시각 안내견 옷을 입은 리트리버는 주인보다 조금 앞서 종종걸음을 걷고 있었다. ‘어어, 큰일인데.’ 그들이 에스컬레이터에서 채 세 걸음도 떨어지지 않았을 즈음, 나는 빠르게 걸어 여자의 팔을 덜컥 잡았다. 탁자에서 밀려 떨어지는 핸드폰을 낚아채듯 본능적인 행동이었다.


돌아온 그녀의 반응에 차가운 공기 같은 것이 일었다. 아무 말도 오가지 않았지만 무언가 잘못되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그녀는 앓는 소리를 내며 몸을 비틀었고 가느다란 팔이 물처럼 내 손을 빠져나갔다. 나는 죄송하다는 말 비슷한 것을 우물거린 후 뒤로 물러났고, 곧이어 리트리버가 방향을 틀었다. 당황과 안도가 뒤섞인 채 멀거니 그녀를 바라보던 나는 얼마 가지 않아 그녀의 신음을 이해했다. 이번에는 어느 인상이 좋은 아저씨였다. 그는 커다란 손으로 그녀의 등과 양 어깨를 감싸 쥔 채 카트를 밀듯 그녀를 밀며 걸었다. 두 개의 에스컬레이터 사이의 가파른 계단을 보고 있자면 그의 마음이 백번 이해되었지만 주는 사람의 호의가 받는 사람에게도 무조건 호의란 법은 없었다. 결국 널찍한 공간에 그녀의 목소리가 울리고 말았다.

“그냥 두세요. 우리가 하게 그냥 두세요.”

그녀가 아저씨의 손을 어깨에서 떼어내며 단호히 말했다. '우리가 하게 그냥 두세요' 그 한 마디가 어찌나 강렬했는지 나는 쥐구멍에라도 숨고 싶은 기분이 들었다. 그건 아마 그녀를 카트처럼 밀던 아저씨 역시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2012년 대만작 '터치 오브 라이트 逆光飛翔'는 앞이 보이지 않는 피아니스트의 삶을 그린 영화다. 극 중의 남자 주인공이자 실화의 주인공이기도 한 황유시앙은 태어나자마자 각막 질환을 앓고 시력을 잃었으나 피아노에 대한 꿈을 버리지 않고 음악 대학에 진학한다. 유일한 장애인 음대생으로 쉽지 않은 생활을 하는 황유시앙은 우연한 기회에 무용가를 꿈꾸는 배달 아르바이트생 치에를 만나 친구가 되고 한 대화를 계기로 서로의 꿈을 응원하게 된다. 대화는 이렇다.

어느 날, 처음으로 황유시앙의 피아노 연주를 들은 치에가 묻는다.

“차가 많으면 걷기에 겁이 나지 않나요.”

황유시앙은 대답한다.

“차는 괜찮지만 사람이 겁이 납니다.”

그리곤 말을 잇는다.

“하지만 겁이 난다고 해도 나는 뭐든지 해보고 싶습니다. 늘 남에게 의지할 수는 없으니까요. 무엇보다 내가 뭘 할 수 있는지를 알고 싶어요.”

황유시앙은 치에에게 하고 싶은 것이 있느냐고 묻고 치에는 머뭇머뭇 말한다.

“사실은 춤을 추고 싶어요.”

그녀는 사정이 좋지 않아 그만두었던 무용의 꿈을 이어가고 싶다 말한다. 춤을 본 적이 없어, 춤이란 어떤 것이냐 묻는 황유시안에게 치에는 온전히 춤과 사랑에 빠진 이의 답을 들려준다. 황유시안은 말한다.

“당신에게 춤이 그런 것이라면 그건 당연히 해봐야 하는 일이지요. 해보지 않고는 자신의 역량을 알 수 없어요.”

치에는 황유시안의 얼굴을 한참 바라보다가 가만히 웃는다.

돌이켜 보면 지난날의 무례는 선한 오만이었다. 신중하지 못한 선의는 돕는 일과 가로채는 일을 구분하지 못했다. 곰곰이 선의와 무례 사이의 거리를 계산해 본다. 선의가 '상대가 바라지 않는 선의'가 되고 무례가 '의도치 않은 무례'가 되는 순간, 정반대에 있을 법한 두 단어는 너무도 닮은 말이 되어버리고 만다. 타인에게 무지했던 나는 그것을 닮은 말로 만들어버리고 말았다.


내가 지난날의 이야기를 털어놓았을 때, 장애인 봉사단 출신의 지인은 몇 가지를 일러주었다. 그 안내견은 예비 안내견이었을 확률이 높다는 것. 그들은 서로에게 익숙해지는 것을 연습 중이며 설령 예비 안내견이 실수로 역주행하는 에스컬레이터로 갔을지라도 시각 장애인은 미리 발을 대어 확인해보는 것이 습관이 되어 있으니 섣불리 나서지 않아도 된다는 것. 무엇보다 그들을 덥석 잡는 일은 절대 금기이며 도움이 필요해 보이더라도 먼저 의사를 물은 후 팔을 내어 그들이 스스로 잡도록 해야 한다는 것. 나는 그 이야기를 몇 번이고 곱씹어 외웠다.



2018년 보건복지부 통계에 따르면 장애를 가지고 있는 대한민국 인구의 수는 286만 명에 달한다고 한다. 전체 인구의 5%가량이며 그들의 가족 친지들을 고려하면 약 20% 전후의 사람들이 연계되어 있는 것이다. 요즈음 인터넷의 건강 리빙 코너에서는 마음에 대한 이야기가 흔하다. 우울증 인구가 100만 시대라는 서론에 이어 그들에게 하지 말아야 할 이야기 목록이나 지인이 이런 증상을 보인다면 좌시하지 말자는 이야기들을 흔히 볼 수 있다. 타인에 대한 공부의 좋은 표본이다. 그 좋은 표본을 보면서도 한편으로 서글픈 기분이 들었던 건, 몸이 불편한 이들에 대한 배려 교육은 그것처럼 쉽게 노출되지 않는다는 사실 때문이었다. 영화의 대사처럼, 그들의 도전할 권리를 선의라는 이름으로 가로채는 일이 얼마나 흔할지. 나 역시도 기어코 한 사람을 불편하게 하여 배워낸 것이라 생각하니 어쩔 수 없이 마음이 씁쓸해졌다.

영화의 주인공 황유시안은 터치 오브 라이프의 개봉을 앞두고 한국을 방문했을 당시 이렇게 말했다.

“계속 노력한다면 다시 희망이 잡히지 않을까. 그런 희망을 알려주고 싶었다.”

그가 영화를 통해 말하고자 한 것은 시각장애인의 현실 극복기가 아니었다.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을 계속해나가고자 고군분투한 이야기였다. 그것은 우리에게 전하는 메시지일뿐더러 황유시안을 닮은 이들이 마땅히 누릴 권리이기도 하다. 선의라는 이름으로 그들의 권리를 가로챌 자격은 누구에게도 없으며 선의와 무례를 닮은 말로 만들 권한 역시 누구에게도 없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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