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날의 개미마을

by 지수연

마을버스 요금통에 덜그럭 50원을 넣고 구불구불 올라가는 길이 참 멀었다. 아직 중학교도 들어가지 못한 나이. 텅 빈 집에 혼자 있을 수가 없어 학교를 마친 나는 언제나 그 길을 올랐다. 방범초소가 있는 종점에 내려 작은 걸음으로 십여분을 더 가면 할머니가 사는 집이 나왔다. 할머니의 집은 종점 버스 정류장보다 인왕산 입구에 더 가까웠다. 어찌 보면 전원주택이고 어찌 보면 달동네 전매특허인 집들이 가득한 곳이었다.


할머니는 친구가 많았다. 요크셔테리어를 마당에서 꼬질꼬질하게 키우던 옆집 할머니가 있었고 서너 살도 안됐을 손녀를 키우는 뒷집 할머니가 있었고 멧돼지를 때려잡던 건너집 아저씨도 슈퍼 앞 딸 부잣집 아줌마도 있었다. 음식을 나누어먹고 자식들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가끔은 소주를 나누어 마시던 할머니의 친구들. 아주 가끔 밝은 대낮에 반주를 하면 빈둥거리는 나를 불러다가 소주 심부름을 시키기도 했다. 돈을 꼭 쥐고 슈퍼에 내려가면 아저씨가 '수연이 왔구나' 하며 까만 봉지에 소주 한 병을 담아주었다. 그러면 나는 남은 돈으로 소라과자를 사 먹었다. 엄마는 그런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질색팔색을 했다. 나는 괜찮았는데. 소라과자를 먹을 수 있어서 좋았는데 엄마는 화가 잔뜩 났다. '애한테 왜 그런 걸 시켜' 하는 소리가 창문 너머까지 들렸다. 엄마는 할머니의 딸들 중 하나였지만 나는 엄마의 하나뿐인 딸이기에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나는 할머니 집의 뜨끈한 아랫목보다 인왕산 초입에 있는 나무가 우거진 정자가 좋았다. 대개 그곳에서 시간을 보냈다. 할머니가 키우던 강아지를 데리고 올라가 정자에 누워 숙제를 하고 리코더를 불고 단소를 불었다. 그러면 가끔 딸 부잣집 아줌마네 딸 하나가 멜로디언을 들고 올라와 같이 연주를 해주곤 했다. 그녀는 내가 유일하게 알고 있는 딸 부잣집 딸이었다. 그리고 나에게는 꽤나 대단한 사람이었다. 중학생씩이나 되었으니 대단하지 않을 리 없었다. 그녀는 리코더도 잘 불고 멜로디언도 정확하게 연주했다. 몸이 약해 병원을 자주 들락거리던 나는 멜로디언을 한 번만 훅 불어도 세상이 빙글빙글 돌았고 단소를 두 마디 연주하면 거의 기절할 지경이 되었는데 그녀는 그러지 않았다. 그저 그런 나를 보며 깔깔 웃다가, 걱정스러워하다가, 해가 질 즈음 다시 집으로 내려갈 뿐이었다.


개미마을의 벽화.


해가 완전히 넘어가면 나뭇잎들이 새까매졌다. 어딘가에서 쉭쉭거리는 소리가 나고 멀찍이 군부대 초소에 불이 들어왔다. 그러면 저만치 아래에서 할머니가 '수연아 밥 먹어라' 소리를 쳤다. 그 소리를 들은 윗집 할머니는 메아리처럼 한번 더 말을 전해주었다. '얘 수연아 밥 먹으란다' 하면서. 창문에 고개를 빼꼼 내밀고 크게 소리를 치면 모두가 들을 수 있었다. 널찍한 산의 울림. 해가 지면 소리가 두 배로 먼 길을 갔다.


할머니가 차려준 단출한 저녁을 먹고 나면 집 앞 돌계단에 앉아 엄마를 기다렸다. 돌계단 옆에는 할머니의 호박밭이 있었고 호박밭 양 옆에는 아주 기다란 나무토막 두 개가 세워져 있었다. 누군가 두 나무를 끈으로 연결해 호박잎 위로 빨래를 널 수 있게 해 두었다. 나는 두 개의 나무 중 하나를 살짝 들어 강아지의 쇠목줄을 걸어두었다. 있는 힘껏 들어 올리면 동그란 쇠목줄 손잡이가 들어갈 만큼 아주 작은 공간이 만들어졌다. 그리고는 강아지와 앉아 어둑한 돌계단 아래를 내려다봤다. 우리가 있는 곳은 밝았다. 처마등에 달린 붉은 전구 하나가 제 몫을 톡톡히 했다. 나방이 불을 다 가릴지경으로 몰려들어도 불빛은 가려지지 않았다. 하지만 계단의 저 끝은 검고 깊었다. 가끔은 다른 집으로 향하는 이들이 스쳐가며 내가 누구인 줄도 모르고 인사를 했지만 나는 고개를 꾸벅 하고 말을 뱉지 않았다. 아니, 잘 모르겠다. 사실은 아는 이들이었을지도 모른다. 어른들은 아이의 얼굴과 이름을 잘 알았으니까. 어느 집 손주와 어느 집 딸. 하지만 낮은 곳에서 올려다본 그들의 얼굴은 너무 낯설고 가까울 뿐이었다. 그렇게 몇몇이 지나고 한참을 더 기다리면 늪 같은 계단 끝에서 엄마가 나타났다. 지친 몸을 이끌고 나를 데리러 왔다. 엄마의 몸에는 녹초 같은 그림자가 달려있었고 그것은 엄마의 몸의 몇 배만큼이나 길었지만 엄마는 나를 보고 반가운 얼굴을 했다. 매일 보는 딸의 얼굴. 매일 아침 헤어지고 매일 밤 만나는 딸의 얼굴.


그리고 한 걸음 두 걸음 걸어 할머니 집으로 발을 들이면 엄마는 마법처럼 딸이 되었다. '엄마 나 왔어. 아휴 너무 피곤하다' 하며 신발을 벗었다. 엄마를 기다리는 딸과 딸을 데리러 오는 엄마와 '얘 밥 먹고 가라' 하며 늦은 밥상을 내어오는 엄마의 엄마. 그러면 그제야 나도 구들방 구석에 들어앉아 엄마와 할머니 곁에 있었다. 할머니, 바닥이 너무 뜨거워, 하며 이불을 엉덩이 밑으로 주섬주섬 깔고는 엄마가 밥을 먹는 동안 까무룩 잠이 들기도 했다. 잠결에도 종종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얘, 내가 수연이한테 연탄 좀 내놓으라고 했더니 새 거를 죄다 내다 놨지 뭐니' 하는 할머니의 웃음 섞인 목소리가 들렸다. 나는 잠에 취한 채 꿈속에서 변명을 했다. 물건은 타면 까매지잖아요. 그런데 연탄은 까만 게 새 거라니, 이상하잖아요. 말이 안 되잖아요.


개미마을의 벽화.


비가 오는 캄캄한 밤, 엄마와 방범초소 앞에서 마을버스를 기다리면 바닥에 기다랗게 다리가 많은 것이 지나갔다. '엄마 지네야' 하면 엄마가 말했다. '죽이지 마라. 약에 쓰는 지네일지도 모르니까.' 나는 오소소 돋는 닭살을 털어내며 자리를 피했다. 약에 쓰이든 안 쓰이든 지네를 죽일 마음은 눈곱만큼도 없었다. 마을버스가 도착하면 도망치듯 후다닥 올라타 냉큼 의자에 앉았다. 우리는 그렇게 집으로 돌아갔다. 매일매일. 익숙한 밤의 연속이었다.




이제 할머니는 깨끗한 아파트에서 아들 며느리와 함께 지내고 있다. 나이가 나이인지라 정신이 온전치 않으셔서 일곱 자식들의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다. 엄마는 할머니의 기도를 하며 종종 울곤 하는데 할머니가 전화로 '얘 너 누구냐' 하고 물어볼 때마다 눈물 쏟는 기도의 횟수가 잦아진다. 정자를 굴러다니던 열 살 언저리의 나는 어느새 음악을 가르치고 글을 쓰는 삼십 대 어른이 되었다. 그리고 할머니가 살던 집, 그 익숙한 동네에는 개미마을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서울에 남아 있는 몇 안 되는 달동네라고 했다. 이십여 년 전의 그 시절에도 그곳은 달동네였을까. 잘 모르겠다. 아직 소수의 주민이 남아있다고 하는데 몇 년 전 그리운 마음에 찾아간 개미마을에서 사람은 쉬이 찾아볼 수 없었다. 세월을 많이 타지 않은 벽화들만이 나를 반겼다. 할머니가 살던 집은 허물어졌고 산 문턱을 오르니 익숙한 정자 하나만 덩그러니 있었다. 정자는 커다란 나무 상자 같았다. 내가 낮잠을 자던 외진 곳의 푹 패인 들판도 사람 둘이 누우면 공간이 없을 정도로 작았다. 모든 것이 그랬다. 이 작은 공간이 어린 나에게는 그토록이나 큰 세상이었다는 사실이 너무도 낯설어, 나는 모든 것이 꿈만 같았다.


개미마을을 떠올리면 산에서 살아가는 체로키 인디언 아이에 대한 어느 소설이 떠오른다. 나의 개미마을은 그런 곳이었다. 세상의 약자들이 모여서 소박한 행복을 추구하는 곳. 정직한 방법으로 욕심부리지 않고 살아가던 곳. 알려지지 않은 약수터에서 맨 손으로 물을 떠먹고 기운이 넘치는 날에는 산 꼭대기까지 올라가 초소의 군인들을 소스라치게 했던 곳. 산딸기를 따려면 뱀딸기를 먼저 살펴야 했던 곳. 뱀딸기 수풀 언저리로 뱀의 꼬리같은 것을 보고 줄행랑 내달렸던 곳. 아카시아를 따먹으면 꽁무니 달달한 것에 작은 벌레까지 딸려왔던 곳. 그리고 엄마와 할머니의 사랑이 있던 곳.


언젠가 나이가 들어 많은 것들을 잊어버려도 그곳의 기억만큼은 쉬이 지워지지 않을 것이라 생각한다. 어찌 잊을까. 그리운 추억들. 그리고 서대문구 홍제동. 산, 으로 시작하던 그 옛날의 주소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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