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것도 아닌 이야기

대면할 수 있을 때에 고개를 들고, 피해야 하는 것은 피하고 싶다.

by 지수연

이십 대 후반이 되었을 무렵에는 현실을 똑바로 마주하려 애썼다. 도망치려는 스스로가 부끄러웠고, 도망칠 수도 없었으며, 도망쳤다 생각해도 정신을 차려보면 언제나 발 디딘 곳은 출발선 안 쪽이었다.


「아주 어릴 적에는 현실을 이성적으로 생각하는 법을 몰랐다. 스무 살이 된 이후로는 도피했다. 몸이 아니라 마음이 이곳저곳으로 도망치느라 바빴다. 이제 이십 대 후반이 되어 서른을 앞두고 있는 나는, 예상치 못했던 상황과 원치 않는 것에 대처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도피'가 아닌 '대면'이라는 걸 깨달았다. 어떤 아픔이나 상처도 똑바로 바라보고 그 순간 느껴지는 감정을 온 마음으로 감당해 내야, 내면의 어리석음을 한 꺼풀 벗겨낼 수 있다는 것. _2014.9.12


그리고 몇 년이 더 흘렀다.




얼마 전 영화 '기생충'을 관람했다. 엔딩 크레딧이 올라가는 몇 분. 나는 조금 숨이 막혔고 조금 갑갑했다. 피해자는 누구이며 가해자는 또 누구인가. 오래 생각하게 만드는 영화였다. 지인이 영화의 이야기를 화제에 올렸다. 영화를 본 소감이 어땠느냐고 물었다. 나는 피우지도 않는 담배를 진하게 한 대 피우고 싶은 기분이었다고 말했다. 그녀는 공감했고 우리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분명 명작이기는 한데, 하며 말 끝을 흐렸다.


언젠가는 또 다른 지인과 어느일본 작가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는 말했다. '저는 그 사람의 소설을 읽으면 이게 그렇게 중요한 이야기인가 싶은 마음이 들더라고요. 제 취향에는 그다지 맞지 않는 것 같아요.' 그리고는 어느 책을 추천해주었다. 비판의 대상이 된 작가가 내가 참 좋아하는 이였던 관계로 나는 그 책을 기대 반 흘김 반으로 집어들었다. 그리고 아니나 다를까. 첫 50페이지를 읽은 후 나는 심드렁한 표정이 되고야 말았다. (일본 작가 시바타 쇼의 소설로 1960년대에 출간되어 200만 부 가까이 판매된 일본의 고전인데도 불구하고 그랬다.) 공산주의 사상과 편협한 시선이 가득한 이야기. 페이지를 넘기는데 고개 절레절레 흔들렸다. 나는 정치적 사상이 얽힌 소설을 질색한다. 그것이 어느 쪽이든 그렇다. 거기에 속 터지는 가족사까지 추가된다면 하악질을 참을 수 없는 고양이처럼 꼬리가 곤두 선다.


외면하고 싶은 이야기.

불편한 진실들에 대해 생각해 본다.

나는 왜 정치사가 얽힌 소설을 싫어하는가.

나는 왜 눈물 쏙 빼는 가족사가 등장하는 소설이 불편한가.

나는 왜 기생충을 명작이라 인정하면서도 말 끝을 흐리고야 말았는가.


지난날 스스로에게 언급했던 '대면하는 나'에 대한 의문이 인다. 결국은 마음속 깊숙한 것들에 대해 스스로에게 되묻지 않을 수 없다. 당신, 아직도 그렇게 세상을 똑바로 바라보고 싶은 것이냐고. 보기에 좋지 않은 것과 느끼기에 아픈 것들을 여전히 마주 하고 싶은 것이냐고. 정말 그런 방식으로 그것들을 이겨내고 싶으냐고. 그에 대한 대답은 언제나 나와 나의 싸움으로 번져나가 끝내는 미지로 마무리되고 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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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아, 사상에 대해 이야기해보자. 나는 사상보다는 일상이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부류야. 사상이 삶의 중심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대개 일상이 사상에 딸려오는 결과물이라고 생각하지. 하지만 일상과 사상을 분리시켜 생각할 수 없는 이야말로 절대로 사상에 대해 논하지 말아야 할 이들이지 않니? 들어봐. 애거사 크리스티가 쓴 '장미와 주목'의 한 대목이야. 「나는 그자들에게 사상을 불어넣고, 사상을 향해 전력투구할 것이다. 그것이 어떤 사상인지는 하나도 중요하지 않다. 사상 따위는 언제든 원하기만 하면 대여섯 개쯤 만들어 낼 수 있다. 모든 것을 올바르게 만들어줄 것처럼 들리고 아주 알기 쉽고 고매하지만 모호한 것, 그러면서도 내면에 타오르는 듯한 기분을 느끼게 해주는 사상이라면 인간을 움직일 수 있다.」'


'아니지. 사상이란 신념이지. 신념은 원론적이며 근본적인 것. 그 원동력은 사람에 대한 연민과 더 나은 세상이 오길 바라는 희망이야. 행여 그들이 만들어 낸 사상의 결과가 만족스럽지 못하다 하더라도 그 근본을 부정할 수는 없어. 어쩌면 허지웅 작가의 말처럼 우리 사회를 지탱해주던 가장 기본적인 믿음들이 세상을 더 많이 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 아직도 그런 걸 믿느냐는 사람들에 의해 수시로 훼손되어 버려지고 있는 건 아닐까. 정직한 방법으로 살아있는 것에 곁을 내어주기를 희망하는 이들의 용기를 그리 간편하게 폄하할 자격은 누구에게 있는걸까. 사상에 이름을 붙이고 매도하기 이전에 그 뿌리를 볼 수도 있을 텐데.'


정부적 사상에 대해 말하자는 건 아니다. 그것이 친정부적이든 반정부적이든 무엇이든 끌어다 쓰면 그만이다. 어떤 상황에 필요한 적당한 글은 그것이 어떤 상황이어도 널리고 널렸다. 이번엔 또 뭐가 문제야, 묻는 나 자신에게 나는 키워드를 바꿔가며 이렇게 구구절절 설명을 한다. 삶에 대해, 돈에 대해, 생명과 사랑에 대해.




스무 살의 나는 어렸다. 스물아홉의 나 역시 어렸다. 그리고 시간이 흐르고 보면 지금의 나 역시 그럴 테다. 그때는 진실을 대면하고 피가 흐르는 상처를 똑바로 바라보는 것만이 옳은 것이라 여겼다. 적어도 나 자신에 한해서는 그 전제가 옳았다. 하지만 나는 감정에 쉬이 휘청이는 사람. 모든 것을 올바르게 만들어줄 것처럼 들리는 고매하고 모호한 것 다급하게 마음이 가는 사람.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은 타인의 일에 눈이 붓도록 울어버리는 사람. 나는 그 이야기를 나 이외의 것에 적용할 수 없다. 시간을 살고 나이를 먹는다는 건 모두가 옳다고 하는 옷, 그 맞지 않은 옷에 나를 끼워 맞추려 한 바탕 쇼를 부리다가 결국은 고개를 젓고 다시 빨간 줄을 그어나가는 것인지 모른다. 이제는 그런 명제 앞에서만이 고개가 끄덕여진다. 무리해서라도 진실을 대면하는 것을 지혜라 여겼던 그때의 나는 살기 위해 한 걸음을 물러섰다. 대면할 수 있을 때에 고개를 들고 피해야 하는 것을 피하는 것. 지금 나의 최선은 이쪽이다.


지인이 추천한 시바타 쇼의 책은 주제를 설명하기 위한 하나의 도구로 공산주의를 사용한 소설이었다. 결국 하고자 하는 이야기는 자신의 중심을 잃어버린 청춘의 방황 같은 것이었는데 완전히 취향은 아니었지만 생각보다 아주 멋진 책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내가 본질을 우회하는 이야기에 먼저 손을 뻗는 것은, 콕 집어 치부를 드러내는 이야기에 마음을 다치는 것이 이제는 싫어졌기 때문일 것이다. 아무것도 아닌 이야기들의 전개, 또 전개. 그 안에서 현실의 속쓰림 따위는 새까맣게 잊어버리고 이야기 속에 파고들다가 의도치 않게 마주하는 부분에서 어라, 하며 뜬금없는 사색에 잠기는 그런 소설들. 이제는 그런 이야기에서 부드럽게 현실을 마주하고 싶기 때문일 것이다. 도망치는 일이라는 생각은 들지 않는다. 그저 나에게 맞는 옷을 이모양 저모양으로 고쳐 입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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