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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솔라리스의 바다 Nov 12. 2023

더 킬러

더 차가웠으면 좋았을 텐데.

데이빗 핀처의 <더 킬러>(2023)는 차갑고 메마른 킬러 영화 혹은 복수극이다. 주인공은 (거의) 100%의 성공률을 자랑하는 킬러다. 하지만 사소한 실수(라기보다는 변수)로 타깃을 놓치고, 거꾸로 목숨을 위협받는 상황에 처한다. 그러자 킬러는 자신을 위해하려는 사람들을 찾아 나선다. 


이 영화에서의 킬러는 마치 수도승처럼 작업에 임한다.

몇 가지는 좋았지만, 몇 가지는 좋지 않았다. 먼저 좋지 않았던 점. (스포 약간 있습니다.)


이 동네의 일을 다룬 영화나 소설을 보면, 대개 실수하는 순간 목을 내놓는 경우가 많다. 성공하더라도 목숨을 잃기 십상이다. 살인을 의뢰하는 쪽도 만만치 않기 때문에 보안의 보안의 보안을 위해 제일 먼저 암살자부터 처리하는 것이다. 스티븐 킹의 소설 <빌리 서머스>가 그랬고, 다른 영화에서도 대개는 가장 일선의 실무자부터 처리한다. <레옹>이나 <존 윅>처럼 직업적인 킬러는 잘 없더라. (그들의 이야기는 너무 낭만적이다.) 


그래서 주인공이 타깃을 죽이지 못했을 때, 아아, 거꾸로 이 자를 처리하러 들겠구나, 하는 생각부터 들었다. 관객인 나도 그러한데 그 동네에서 산전수전 모두 겪었을 주인공은 당연히 그렇게 생각해야 하지 않았을까? 은신처로 돌아갔다가 집이 습격당하고 동거인이 병원에 입원한 장면에 충격을 받는다는 건 너무 나이브하다. (심지어 동거인이 죽은 것도 아니다.)


그래서 주인공은 차곡차곡 물줄기를 잡아서 올라간다. 제일 먼저 브로커를 처치하고 집을 습격했던 이들을 처리한다. 마지막으로 처음 사건을 의뢰했던 사람을 찾아간다. 결국 그가 살인을 의뢰하고, 의뢰가 실패하자 뒷수습까지 지시했던 인물이다. 본인은 일이 이렇게 될 줄은 몰랐고, 그 당사자가 (눈앞에 총을 들고 서 있는) 주인공일 줄은 몰랐다고 변명한다. 당연하다. 그렇게 의뢰(혹은 지시)하는 사람들은 하부에서 누가 총대를 메는지 모른다. 말과 말, 서류와 서류, 돈과 돈이 움직일 뿐이다. 아래 것들의 일은 신경 쓰지 않는다. 아마도 인간이라기보다는 부속품 정도로 생각할 것이다. (주인공이 그 인물을 찾아갔을 때도 그는 전화로 누군가를 조지고 있었다. 비대면으로 지시하고 일을 처리하는 방식. 이게 그 사람, 아니 현대 사회의 방식이다.)


그런데 주인공은 그를 죽이지 않는다. 내가 보기에 그가 제일 나쁜 사람이었다. 돈으로 지시하는 사람. 의뢰인. 이렇게 될 줄 몰랐다는 헛소리를 하는 사람. 2시간 내내 냉혈한 그 자체였던 주인공은 왜 그를 죽이지 않았는지 모르겠다. 오히려 그 사람만 죽였어야 했다. 다른 이들은 돈을 받고 일을 하는 그저 노동자, 하청업자들이었는데 말이다. 이것이 영화를 보면서 가장 아쉬웠던 점이다. 


굉장히 철두철미한 직업의식을 보여주는데 비해서, 사소한 변수로 인해 임무를 마치지 못한다. 차라리 어린아이가 있어서 죽이지 못했다든지 하는 식의 설정이 더 나았을 것 같다.

아, 또 한 가지. 주인공은 말을 거의 하지 않지만, 내레이션이 너무 많았다. 그 정도 경력을 갖고도 계속해서 비슷한 좌우명을 외우며 일을 처리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건 유능하다고 볼 수 없다. 사적인 감정은 버리고 돈이 되는 일만 하라, 등등의 킬러수칙 1조(만약 이런 게 있다면) 같은 얘기를 하는 건, 처음 일을 시작했을 때나 할 법하다. (갑자기 <좀비랜드>의 주인공이 수칙을 외우는 게 생각났다) 심지어 그렇게 수칙을 외우고, 며칠 전부터 금욕적인 스타일로 타깃을 기다리고, 자기 스타일로 공간을 꾸미고 마치 예술을 하듯 총을 겨눴으면서도 타깃 대신 다른 사람을 맞췄잖나? 나는 그 장면이 굉장히 이상했다. 아니 이런 숙련자(처럼 보이는 사람)가 그 정도의 행동 예측은 했어야 하지 않나?


하지만 좋은 점도 있다. 


우선 데이빗 핀처의 영화였다는 점. 오랜만에 핀처의 영화를 볼 수 있어서 좋았다. 이제 그는 더 이상 <파이트 클럽>(1999) 같은 영화는 만들지 않을 것 같다. <조디악>(2007)을 기점으로 해서, 이제는 <더 킬러> 같은 영화만 만들기로 했나 보다. 인물 내면의 깊은 곳으로 파고들면서 자연스럽게 외면의 스타일리쉬는 포기한 듯하다. 그게 좋을 수도 있고 나쁠 수도 있다. 


그리고 어쨌거나 차가운 복수극을 표방한다는 점이 좋았다. 그리고 한낱 개인이 조직/줄기를 쳐부순다는 점에서도 좋았다. 나는 이런 복수극을 좋아한다. <파커>(테일러 핵포드, 2013)라든지 <페이백>(브라이언 헬겔랜드, 1999) 같은 할리우드 영화도 좋아하고, <헌트>(크레이그 조벨, 2020) 같은 영화도 좋아한다. 사실은 60~70년대 복수극들, 예를 들면 리 마빈이 나왔던 <포인트 블랭크>(존 부어맨, 1967)라든가 마이클 케인의 차가운 복수극 <겟 카터>(마이클 호지스, 1971), <가르시아의 목을 내게 가져 와>(샘 페킨파, 1974) 같은 영화를 정말 좋아한다. 



아마 <더 킬러>도 위의 계보에 들어갈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조금 아쉽다. 더 차가워도 될 텐데, 말을 좀 덜해도 좋았을 텐데. 조그만 더. 


마지막으로 주인공 킬러 역을 맡았던 마이클 패스벤더에 대해 말하고 싶다. 2010년대 <엑스맨> 시리즈의 매그니토 역으로 알려져 있었지만, 나는 그가 출연한 <카운슬러>(리들리 스콧, 2013)를 좋아한다. 그 영화가 바로 차가운 범죄물이다. <더 킬러>도 좀 더 메마르고 서늘한 영화가 될 뻔했는데, 그러지 못해 아쉽다. 마이클 패스벤더가 나왔는데도, 데이빗 핀처가 만들었는데도 그러지 못해서 아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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