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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솔라리스의 바다 Jun 08. 2022

신용문객잔

모두가 멸망을 향해 달리는 영화

오랜만에 <신용문객잔>(이혜민, 1992)을 봤다. 이 영화는 아마도, <용문객잔>이라는 영화의 리메이크작일 것이다. 용문객잔에서 일어나는 혈투를 담고 있다. 뻔한 내러티브지만, 배우의 스타성으로 밀고 나간다.     



1990년대 초, 홍콩영화는 판타지 무협의 시대였다. 80년대 말의 홍콩 누아르에서, <지존무상> 같은 카지노 액션으로 흐르다가, <소오강호>의 흥행과 함께 판타지 무협이 펼쳐졌다. 홍콩의 중국 반환을 앞두고, 어쩌면 무협 세계의 어딘가로 숨고 싶었나 보다.     


이 영화는 누가 뭐라고 해도 임청하의 영화다. 어차피 그 시기의 모든 영화는 임청하의 것이지만. 그나저나 양가휘가 이렇게 잘 생겼는지 몰랐네. 옛날에는 그저 느끼하다고만 생각했는데. 그리고 이 영화에는 장만옥이 있다. <화양연화>의 장만옥이 있기 전, 미스 홍콩 출신의 장만옥은 성룡 영화로 데뷔했고, 이 영화에서는 그저 감초 역할을 해야 했다. 내가 장만옥이었다면, 이런 역할은 싫었을 것 같다. 포커스는 임청하에 맞춰 있고, 장만옥은 끝까지 제삼자여야 했다. 그래도 몇몇 장면에서 장만옥은 페이소스를 자아낸다. 아무리 억척스러운 척 해도 장만옥은 장만옥이고.     


나는 왜 이 영화를 좋아할까? 시나리오도 이상하고, 특히 엔딩 결투씬의 반전은 황당하기 그지없지만, 이 영화를 사랑한다. 오늘 다시 보면서 생각한 건데, 이 영화에는 종말이 있다. 모두가 끝을 향해 달린다. 마치 홍콩 누아르 같다. 그곳, 용문객잔에서는 더 이상 물러날 곳이 없다. 끝장을 보기 위해 모였고 죽음만이 기다리고 있다. 각자 다른 목적을 가지고 만나 한쪽은 죽어야만 하는 여러 무리의 결투다. (쿠엔틴 타란티노는 자기 영화의 설정을 이런 홍콩 무협에서 가져왔나 보다.)      


이 영화를 처음 본 날이 기억난다. 나는 친척집에 있었다. 친척은 여행을 떠났고, 나는 그 집을 지켜야 했다. 좋았다. 며칠 동안 혼자서 마음껏 놀 수 있었다. 그때 <신용문객잔>을 비디오로 봤다. 하지만 영화는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그때는 그런 때였다. 불안과 잠 못 드는 밤, 흔들림이 멈추지 않는 마음. 세상의 끝에서 나만 있는 기분. 그런 시기였다. <신용문객잔>과 나는 이상한 때에 만났다. 이후 시간은 묘하게 흘렀다. 오랜 세월이 흐른 뒤, 오늘처럼 잠 못 드는 밤, 다시 만나서 반가웠다. 지금도 이상한 날은 계속되고 있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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