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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 배틀 애프터 어나더

세상 돌아가는 모습을 보자.

by 솔라리스의 바다

이 영화의 예고편을 몇 번 봤던 나는, (주의 깊게 보진 않았기에) 막연하게 액션코미디영화라고 굳게 믿고 극장에 갔다. 초반의 진지함이 바로 끝날 줄 알았는데, 2시간 40분 내내 진지함의 연속이었다. 아니 진지함이라기보다는 피식거리는 웃음을 감춘 독설이긴 했다. 그래, 폴 토마스 앤더슨의 영화라는 걸 잠시 잊고 있었어.


<원 배틀 애프터 어나더>는 백인 우월주의자들과 극좌 혁명가들을 동시에 조롱하면서도 여전히 진보를 응원하는 괴상하고 용기 있는 영화지 싶다. 보는 내내 전 세계를 활보하고 있는 극우들이 떠올랐다. 물론 영화적으로는 <시빌 워>의 액션 버전이자 <파이트 클럽>의 또 다른 이야기처럼 보이기도 했다.


특히, 백인 우월주의자를 상징하는 록조의 이중적인 모습과 극좌 혁명가인 퍼피디아의 배신은 '극과 극은 통한다'는 거리의 상식을 다시 상기시켰다. 게다가 그 둘은 운명처럼 결합하니까 말이다. 하지만 언젠가 밥과 윌라가 만날 때 울릴 멜로디를 기대하며 영화를 봤던 것도 사실이다. (그리고 결국은 울린다. 낭만적이진 않았지만.)


그래서 밥(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 분)은 바보인가? 그래 보이기도 한다. 물론 다소 멍충이처럼 보이는 밥이지만 그래도 밥은 진심이었다. 혁명도 아내에게도 딸에게도. 내가 보기에 가장 근사한 혁명가는 세르지오(베니치오 델 토로 분)였다. 그에게선 일상과 대의와 숙명이 느껴졌다. (가정을 거부하고 자신을 위해서 혁명가가 되는 퍼피디아와는 반대편에 서 있다) 그래서 그의 엔딩은 따뜻한 선물이라고 생각한다.


긴긴 영화였다. 그동안 폴 토마스 앤더슨의 영화는 나와 맞지 않는다고 생각했고 실제로 많이 보지도 않았다. 폴 토마스 앤더슨의 <마스터>를 보고 함께 이야기를 나누기로 한 친구가 있었다. 아직도 <마스터>를 보지 못했고, 그 친구는 더 이상 친하지 않게 되었다. 세월이 혁명가만 무디게 만드는 건 아니다. 하지만,


세상을 보라. 밥의 싸움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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