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양의 제국에 불던 바람

낙원상가 옥상에서 만났던 비행 소년

by 솔라리스의 바다

벌써 30년 전 이야기다. 당시 중학생이던 나에게 서울의 중심가란 곧 종로를 의미했다. 왜 그랬는지는 논리적인 이유는 모른다. 막연하게 왕이 살았던 동네니까 그렇게 생각했을 지도. 친구도 같은 생각이었다. 그래서 우리는 기회가 있을 때마다 종로에 갔다. 구체적으로 뭐가 있는지는 몰랐지만 무척 넓은 동네라는 생각은 들었다. 사람도 많았고.


1989년 여름, 기말고사가 끝난 날에도 우리는 종로에 갔다. 시험이 끝난 기념으로 영화를 보자고 했다. 그런데 그날따라 친구가 큰 소리를 쳤다. 예전에 을지로에 살았다고 했다. “이쪽은 내가 잘 아니까, 나만 믿어.” 옛날에 부모님이 중국집을 했다고 한다. “가끔 배달도 나갔거든. 큰길, 골목길 할 것 없이 좍 꿰고 있다고.” 그 나이에 벌써 오토바이를 탔다니. 갑자기 녀석이 다르게 보이기 시작했다.

특별히 하고 싶은 일이나 보고 싶은 영화가 있었던 건 아니었다. 시험이 끝났으니 뭘 해도 즐거운 날이었다. 그저 평화로운 오후를 맛보고 싶었다. 게다가 친구랑 종로에 왔잖아. 가벼운 마음으로 친구를 따라다녔다. 하지만 기대만큼 평화롭지는 않았다.


우리는 세 시간이나 헤맸다. 종로의 길은 갑자기 명동으로 이어졌고 우리는 청계천에 있다가 을지로를 걷다가 했다. 계속해서 빌딩 숲과 청계고가도로의 그늘을 빙빙 돌고 있을 뿐 극장은 눈을 씻고 봐도 찾을 수가 없었다.

친구는 내 눈치를 보며 연신 땀을 흘렸다. 그리고 “이상하다. 여기가 아닌데.”를 연발했다. 그런 모습을 보고 있자니 측은한 마음까지 들었다. 사실 나는 아무래도 좋았다. 영화를 안 보면 또 어때? 이렇게 걷는 것도 괜찮은데.

친구의 젖은 등을 바라보다가 ‘이제 그만 밥이나 먹으러 가자, 엄청 싼 경양식집을 알거든.’이라고 말하려는 순간, 친구가 소리를 질렀다. “찾았다!” 엉겁결에 친구가 가리키는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나 말고도 지나가는 사람 몇 명이 함께 고개를 돌렸던 것 같다. 그렇게 눈앞에 나타난 곳은 허리우드 극장이었다. 옆에는 낙원상가라는 이름도 함께 붙어 있었다. 그리고 대형 간판에 그려진 영화는 바로 <태양의 제국>(스티븐 스필버그, 1989).


1874E2154C246EA907 옥상에서 비행기를 바라보던 짐과 그날 낙원상가 옥상에 있던 우리는 어떤 점에서는 닮아 있었다.

갑자기 의기양양해진 친구는 처음부터 이곳이 목적지였다고 말했다. 며칠 전부터 이 영화가 보고 싶었노라고. 솔직히 믿기지 않았다. 아까는 그런 얘기가 없었는데. 하지만 스티븐 스필버그 감독이라는 글자를 보는 순간 마음이 흔들렸다. 친구가 곁들였다. “스필버그가 만들었으면 무조건 봐야 하는 거 아냐? 벌써 매진되었을지도 몰라.” 갑자기 불안해졌다.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는 시간도 아까워서 계단으로 뛰어올라갔다. 엄청 재미있겠지? 마음속에서 영사기가 켜졌다. <죠스>와 <이티>와 <인디아나 존스>가 떠올랐다.


옥상에 도착했을 때, 처음 눈에 들어온 건 파란 하늘이었다. 뭉게구름이 떠 있는 여름 하늘. 그리고 바람이 시원했다. 조금 의아했던 건, 극장에 사람이 많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상하다, 스필버그 영화잖아. 잘못 찾아왔나? 그때 매표소 아저씨가 표를 빨리 끊으라고 했다. 영화가 곧 시작될 예정이었다. 우리는 다시 뛰었다. 아이고야.


영화에는 외계인도, 인디아나 존스도 나오지 않았다. 대신 우리 또래의 버릇없는 녀석(나중에 <다크 나이트>에 출연하게 된다.)이 등장하고, 엄청나게 시니컬한 아저씨(나중에 <존 말코비치 되기>에 출연한다.)가 나올 뿐이었다. 팝콘을 먹고 있자니 졸음이 밀려왔다. 하루 종일 헤매고 다닌 결과였다. 정말 꿀잠을 잤다.


중간에 허리가 아파서 눈을 떴다. 엄청 자고 일어났는데도 영화는 아직 상영 중이었다. 졸린 눈을 비비며 화면을 바라보았다. 해 질 녘 하늘에 무스탕 전투기가 신비롭게 날아다녔고 소년은 폭격의 불기둥과 상관없이 비행기를 보며 소리를 질렀다. 영화 속 어른들은 소년을 만류했지만, 주변과 상관없이 뭔가를 좋아하는 그 심정이 왠지 이해가 되었다. 우리도 같은 소년이었으니까. 그러자 왠지 멜랑꼴리 한 기분이 되었고 온탕에 들어간 것처럼 몸이 간지러웠다. 강제로 착한 어린이가 되는 기분이랄까. 엄마가 머리를 곱게 빗어주는 것 같았다. (그리고 얌전히 기다리는 내 모습을 거울로 보는 기분이다.)


영화를 끝나고 밖으로 나왔다. 잠이 덜 깼는지 연신 하품을 했다. 하지만 기분이 상쾌했다. 긴 영화가 끝나서 일까? 아니면 잠을 잤더니 피곤한 게 풀렸나? 인사동 쪽 빌딩 유리창으로 노을의 붉은빛이 반짝거렸다. 마치 영화에서 본 노을 하고 비슷한 것 같았다. 그리고 바람이 엄청 불었다. 얼굴에 부딪히는 바람에서는 여름 냄새가 났다. 갑자기 심장이 뛰었다. 괜히 두근거렸고 설레었다. 화장실에 다녀오던 친구가 “스필버그 영화 치고는 작품성이 매우 뛰어난 것 같다.”라고 평론가처럼 말했다. 나도 고개를 끄덕였다. 굉장히 좋은 영화 같았다.


갑자기 배가 무척 고팠다. 내 마음을 알았는지, 친구가 입을 열었다. “짜장면 먹으러 가자. 우리 집이랑 경쟁했던 중국집이 이 근처에 있거든.”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얘는 모든 종류의 중국요리를 다 먹어본 친구니까. 그중에서 제일은 짜장면이라고 했으니까. 친구가 그렇다면 그런 거다.


우리는 뚱땅거리는 전기 기타, 피아노, 색소폰 소리가 들리는 낙원상가의 계단을 뛰어 내려갔다. 야호, 야호 하면서. 친구가 확인하듯 물었다. “즐거운 하루였지?” 그런 것 같다. 예상대로 된 건 하나도 없지만, 평생 기억날 것 같았다. 친구가 뛰기 시작했다. 나도 덩달아 뛰면서 영화에서 본 비행기를 생각했다. 옆에 있는 친구를 생각했다. 세상에, 오늘 같은 하루가 없었다. 그리고 이날 이후 진짜 여름이 시작되었다. 처음으로 여자애와 데이트를 했고, 록음악을 듣기 시작했으며, 종로를 내 집 드나들 듯 다녔다.


그리고 영화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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