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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솔라리스의 바다 Jun 30. 2022

중경삼림

90년대의 공기를 잔뜩 머금고 있지

<중경삼림>(1994)은 <동사서독>(1994)을 만들고 있던 왕가위 감독이, 당시 너무나 바쁜 배우들과 작업하면서 생긴 스케줄의 팽팽함에 그만 심경의 균열을 일으켜, 잠시 휴식을 갖는 사이에 만든 영화라고 알려져 있다. 


당시에는 스타급 배우들의 스케줄이 멀쩡한 촬영 일정까지도 중단시킬 수 있구나, 하면서 배우와 소속사의 행태를 개탄했지만, 이제 와서 생각해보면, 배우들도 배우들이지만, 시나리오라는 걸 싫어하며 자동기술법처럼 자기 마음대로 연출하는 감독의 한가로운 촬영 스타일이 더 큰 원인이 아니었을까 싶다.     



어쨌거나 한 달인가 두 달인가의 휴식기간 동안 왕가위는 심심하셨는지 시간이 되는 배우와 신인을 데리고서 뚝딱뚝딱, 세 개의 에피소드를 촬영했다. 그중 두 개가 모여 <중경삼림>이 되었고, 나머지 하나는 길게 늘여 <타락천사>(1995)가 되었다.


왕가위의 트레이드마크인, ‘과잉’이 너무 지나쳐서 아주 느끼한 영화가 되어버린 <타락천사>를 제외하고, <동사서독>과 <중경삼림>에 대해서 이야기한다면, 이 둘은 이란성쌍둥이처럼 겉모습은 다르지만, 알맹이는 똑같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장르가 어떻든 간에 명백히 멜로물이다. <동사서독>이 사극 멜로라면, <중경삼림>은 도시 멜로랄까?     


나는 특히 <중경삼림>을 좋아하는데, 어쩌면 영화보다도 그 시절의 공기를 좋아하는 건지도 모르겠다. 


나는 이 영화를 지금은 없어진 종로의 코아 아트홀에서 보았다. 당시에도 이 영화는 적잖이 화제가 되었다. 그래서 매일 같이 매진이었다. 200석 정도의 작은 영화관엔 청년들로 북적거렸다. 사실 영화를 극장에서 보는 건, 음악을 라이브로 듣는 것과 비슷한 감동이 있다. 특히 이런-감수성 풍부한-영화를 또래의 사람들과 함께 보면서 묘한 연대감을 느끼기도 했다. 80년대에는 같이 구호를 외치고 최루탄 가스를 마시면서 우정을 키웠다면, 90년대에는 극장에서 영화를 보면서 감정을 공유했던 것이다.



<중경삼림>은 두 개의 이야기로 이루어져 있다. 첫 번째 에피소드는 임청하와 금성무가 주인공이며, 두 번째 에피소드는 양조위와 왕정문이 주인공이다. 그중에서 두 번째 에피소드가 상당한 인기를 끌었다. 하지만 두 에피소드 모두 도시를 살아가는 젊은 녀석들의 외로움과 사랑, 특히 엇갈린 사랑의 시간차 공격에 대해 이야기한다. 그리고 현실 속의 구질구질한 연애와는 달리 쿨한 사랑과 이별을 보여준다. (영화니까 가능하다!) 당시 우리들은 그런 영화를 보면서 그 내밀한 사연에 공감하고 위로를 받았으며 자신의 스타일을 키워나갔다.     


얼마 전에 영화를 다시 봤다. 사실 내용은 별개 없다. (중요하지도 않다) 하지만 무드는 여전했다. 그리고 이 영화를 처음 봤을 때의 풍경이 떠올랐다. 마치 마르셀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처럼, 내레이션, 이미지, 음악이 나오는 순간, 1995년으로 돌아가고 말았다. 8월, 종로 2가의 풍경, 하늘, 아무것도 안 해도 즐거운 시절. 


그런 영화들이 있다. 당대를 온전히 담아내는, 작품성은 별개로 시대의 공기를 가득 담고 있는 영화 말이다. 나에게 <중경삼림>은 그런 영화입니다. 90년대 공기를 머금은 영화. 더불어 추억까지 함께. 그렇게 기억될 것이다. 아마도 영원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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