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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솔라리스의 바다 Jul 10. 2022

곡비

어쩌면 생각보다 위태로운 세상에서 살고 있는 것 같다

제26회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가 열렸다. 나는 즐거운 마음으로 심야 섹션(정확한 명칭은 모르겠다)을 봤다. 이건 밤 12시부터 공포영화를 연달아 3편 보여주는 프로그램이다. 사실 어떤 영화가 걸릴지 모른다. (내용을 안 보고 예매하기 때문이다) 예전엔 3편 합쳐 500명 정도는 죽는 영화를 본 적도 있고, 좀비물만 연달아 상영된 적도 있었다. (그중 한 편은 바닷가를 배경으로 한 브라질 좀비 영화였는데, 좀비로 변한 어류들이 해변으로 헤엄쳐 오기도 했다.) 


이번에 본 영화는 <악은 악으로>(월트 데이비스, 1972), <뱀파이어 구하기>(코너 맥마흔, 2021) 그리고 <곡비>(롭 자바즈, 2021)였다.     


<악은 악으로>의 경우, 1960년대 히피문화에 대한 반동으로 급격히 보수화한 1970년대의 미국을 돌려 까는 영화처럼 보였다. (확실하진 않다) 이렇게 반신반의하는 이유는 영화의 완성도가 많이 낮았기 때문이다. 16mm 필름으로 촬영한 이 영화는 안티 섹스 주의자가 등장하여, 자유 섹스를 반대하는 한편, 여성을 침대로 유혹하는 남자를 죽인다. 그러나 그의 행태가 너무나 가소로워서 헛웃음만 안겨준다. (시종일관 찬송가를 부르는가 하면, 사기꾼인 데다가 살인도 어설프다) 게다가 영화의 첫 시퀀스부터 시체에서 흘러나온 피가 아예 물감처럼 보였기 때문에, ‘무슨 이런 영화가 있나?’라는 의구심을 안겨주었다. 그러나 이런 점을 너그러이 이해하고 본다면, 재미있을 수도 있다. 실제로 관객들은 이렇게 말도 안 되는 설정이 나올 때마다 폭소와 박수를 보내줬다. 물론 영화제니까 가능한 분위기지만.     


<뱀파이어 구하기>는 가족 중 한 명이 뱀파이어가 되면서 겪는 소동극이다. (동생인 맷이 주인공인데, 꼭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의 골게터였던 웨인 루니의 어린 시절처럼 생겼다) 집안의 천덕꾸러기인 형 데코는 여자 친구도 있는 주제에 클럽에 갔다가 여자 뱀파이어에게 물린다. 그래서 집으로 돌아오지만, 엄마는 데코를 너무 싫어하고, 동생도 형이 부담스럽다. 그런 가운데, 뱀파이어 슬레이어 같은 사람이 등장하는 등 여러 일들이 꼬이기 시작한다. 이 영화는 <새벽의 황당한 저주>(에드가 라이트, 2004)처럼 편하게 즐길 수 있는 코미디다. 저렇게 영화의 톤을 코미디에 놓고 제작하면, 정말 부담 없이 영화를 만들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래서 부러웠다. 

일반적으로 사람의 피를 빠는 괴물을 흡혈귀라고 한다. 현실에서는 없는 존재지만, 다른 의미로 흡혈귀 같은 사람도 있다. 주위 사람들에게 달라붙어서 여러 이득을 취하는 사람을 가리킨다. 이 영화에서는 데코가 그렇다. 인간일 때도 흡혈귀 같은 존재였는데, 결국은 흡혈귀가 돼서 동생의 피를 빼앗으려고 한다. 매우 직접적인 비유가 아닌가 싶다.     


<곡비>는 끝내주는 영화였다. 대만에서 만든 하드코어물인데, 기본적으로는 분노 바이러스가 퍼진 <28일 후...>(대니 보일, 2002)와 굉장히 비슷했다. 영화 속 사람들은 '앨빈 바이러스'에 감염되는데, 이 바이러스에 노출되면 평소 억누르고 있던 폭력 본능이 활성화된다. 그래서 폭력, 살인, 강간을 자행한다. 이렇게 도시 전체가 폭력, 살인, 강간으로 가득 차게 된다. 더 무시무시한 건, 이들이 괴물이 아니라 여전히 인간이라는 점이다. 좀비의 경우, 좀비가 되는 순간, 자신이 인간이라는 사실을 잊어버리고, 좀비의 본능에 충실하게 된다. 그래서 그들이 인간의 장기를 씹어먹어도, 괴물의 본능이라고 치부하고 만다. 하지만 <곡비>에서는 평소에 억누르고 있던 파괴 본능만 커지는 것이다. 그러므로 (괴물과 다름없긴 하지만) 인간인 채로, 다른 사람을 죽이고 생살을 뜯는다. 그래서 <곡비>를 보고 있으면, 사람이 과연 어디까지 잔인해질 수 있을까 궁금해진다. 

사실 현대 사회에서 사람들은 본능과 이성, 욕심과 사회적 체면 사이에서 균형을 맞추며 살고 있다. 그러다가 이성의 끈이 끊어지는 순간, 예를 들어 술을 마신다거나 극도의 흥분 상태가 되면, 간혹 본능이 이성을 뛰어넘기도 한다. 하지만 대부분은 지켜야 할 도리 같은 것을 생각하며 산다. (이를 위해 교육과 규범과 법 체제가 존재하는 것이다) 그런데 만약 사소한 이유로, 이런 균형이 살짝 일그러지면 어떻게 될까? 어쩌면 너무나 쉽게 <곡비> 속 세상이 펼쳐질지도 모른다. (아닐 수도 있다. 우리는 동물이 아니라 인간이니까.)


영화를 보다가 어쩌면 생각보다 위태로운 세상에서 간신히 하루를 살고 있구나,라고 생각했다. 그런 의미에서 무서운 영화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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