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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솔라리스의 바다 Jul 18. 2022

검은 물 밑에서

스멀스멀 피어나는 축축한 공포

나는 공포영화를 좋아한다. 적당하게 무섭고 적당하게 자극적이기 때문이다. 그러면서도, 영화가 끝날 무렵이면 안전하게 현실로 복귀할 수 있다는 것이 좋았다. 


보통 우리나라의 공포영화는 원한을 가진 자가 유령이나 괴물로 되돌아와 원한을 풀고는 사라진다. 그래서 대개의 희생자들은 죽을 만한 짓을 저지른 경우가 많다. 그러므로 아무리 끔찍한 영화를 봐도, ‘그래, 저 사람은 죽을 짓을 했어. 하지만, 난 아니거든. 앞으로도 착하게 살아야지.’ 등의 자위를 하면서 마음을 놓을 수 있었다. 적어도 착하게 살기만 한다면 안전할 수 있다. 


하지만 이건 그 옛날의 일이다.      


1990년대 이후, 끈적거리고 기분 나쁜 영화들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특히 일본 영화들 중에 그런 영화들이 많다. 사람들은 더 이상 원한 때문에 죽지 않는다. 아무런 이유도 없다. 마침 그 자리에 있었기 때문에 죽을 뿐이다. (<링>이나 <착신아리> 같은 영화들이다) 이런 식의 영화에 더 이상 위안 따위는 없다. 이토 준지 공포 컬렉션의 한 에피소드를 영화화한 <토미에 리플레이>(미츠이시 후지오, 2000)를 보면 이런 대사가 나온다. “그냥 운이 없었다고 생각해.” 이렇게 운이 없어서 사람들이 죽어나가는 영화들을 보면, 찝찝하고 기분 나쁘다. 영화가 끝난 뒤에도 기분이 개운치 않다. 공포영화로서는 제대로 공포를 선사하는 셈이다.      


<검은 물 밑에서>(나카타 히데오, 2002)는 스츠키 코지(소설 『링』을 쓴 작가다)의 물에 관한 공포소설 『어두컴컴한 물 밑에서』 중, 첫 번째 단편인 『부유하는 물』을 장편으로 옮긴 것이다. 영화 속에서 이혼을 준비 중인 요시미는 6살 난 딸과 함께 낡은 아파트로 이사를 온다. 친권을 확보하기 위해선 어떻게든 독립된 집이 있어야 하는 것. 하지만 천장에는 불길한 검은 물 자국이 점점 번져나가고, 아파트에서는 이상한 일들이 일어난다.      


사실 평범한 줄거리다. 낡은 아파트와 의지할 곳 없는 젊은 엄마와 귀엽고 작은 여자아이. 그리고 이상한 징조들. 뻔하다. 공포가 있어야 할 곳에 공포가 나타나는 식이다. (그러나 연출자는 공포를 마음대로 쥐고 흔든다. 알면서도 당한다는 건 이럴 때 쓰는 말이다.) 불쌍한 이들에게 왜 무서운 일이 일어나는 것일까? 이유는 없다. 단지 그곳으로 이사 왔기 때문이다.   


이 영화의 또 다른 주인공은 물이다. 모든 사건의 시작이기도 하다. 물은 생명의 근원이다. 물은 깨끗해야 한다. 그래서인지 물이 썩거나 변했을 때, 사람들은 굉장히 무서워한다. (물맛이 변하는 괴담을 떠올려 보자) 더불어, 물과 어머니를 연결 짓는다. 여기에 모성애가 피어난다. (그래서 혼자 놀던 아이가 빠진 곳이 자궁과 비슷한 물탱크라는 점도 의미심장하다) 더구나 영화의 엔딩을 생각하면, 물과 어머니, 구원과 희생이 잘 어우러졌다고 생각한다. (이 영화는 여성의 영화다. 남자는 발 디딜 틈이 없다. )


이 영화에는 에필로그가 있다. 몇 년 뒤, 주인공은 우연히 자신이 살던 집을 방문한다. 처음에는 이 에필로그가 사족이라 느꼈다. 그러나 그 에필로그의 정점에서 들리는 한 방울의 물소리는 새삼, 이 영화가 무엇에 관한 영화인지 확인시켜 준다. 물이 한 방울 톡 떨어지는데, 마치 온몸이 얼어붙는 것 같았다. (극장에서 봤을 땐 그랬습니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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