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제나 당신을 신뢰할 수 있어요. 시걸
그러니까, 이야기는 약 30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이제 막 무언가를 해보려고 목을 내밀고 세상을 두리번거릴 때의 이야기이다. 당시 대학 신입생들은 하나 같이 둥지 속 어린 새들처럼 얼굴을 내밀고 두리번거렸지만, 나는 혼자 학교 근처의 극장을 순례했다.
이 무렵의 나는 <어바웃 어 보이>의 월처럼 혼자서 보낼 시간이 아주 많았기 때문에, 영화 보는 것 이외에도 책을 읽거나 음악을 듣거나 산책을 하거나 잠을 자면서 시간을 보냈다. 물론 영화 보는 것이 제일 맘에 들었다. 보다가 졸리면 잘 수 있었고, 자다 깨면 다시 영화를 볼 수 있었기 때문이다. 대개는 수업을 빼고 평일 낮에 극장에 갔었는데 당시에 을지로 쪽의 커다란 극장들은 주변이 어둡고 사람이 없다는 점이 특히, 맘에 들었다.
그러던 어느 날, 나에겐 운명과도 같은 형님, 스티븐 시걸을 만나게 된다. 블랙홀의 노래 가사처럼 ‘다시 오지 않을 황금빛 날’이었고, 스티븐 스필버그 식으로 말하면 ‘미지와의 조우’였던 셈이다.
사실 그의 전작 <복수무정>과 <언더 씨즈 1>이 비디오 대여 업계에서 맹위를 떨치고 있었지만, 나는 순전히 비디오 가게의 지적인 아르바이트 여학생 때문에 뭔가 예술적이고 컬트적인 영화만 빌리곤 했다. (빌렸다고 했지, 봤다고는 하지 않았다!) 그래서 그를 놓치고 있었다. 인정한다. 나는 이것 때문에 언젠가 시걸에게 용서를 구했다. 당신의 진가를 뒤늦게 알아본 것에 대해 사과했다. 하지만 시걸은 (친절하게도) 무표정으로 일관했다. 가라테를 쓰지 않았고, 화를 내지도 않았다. 그냥 머리를 빗어 뒤로 넘기고 예쁜 머리 끈으로 묶으면서 먼 곳을 응시했다. 무표정하게.
당시 내가 살던 곳에는 개봉관이 없었다. 그 동네는 김홍준 감독님의 <장미빛 인생>에 나왔던 동네 근처였는데, 촘촘하게 줄지어 선 삼류극장과 만화 쪽방이 다였다. 하지만 서태지가 등장할 무렵, 지하철역 바로 옆에 백화점이 생기더니 백화점의 이름을 딴 극장이 처음으로 생겼다. 나는 진심으로 환대했고, 뿌듯했다. 그 극장, 우리 동네가 3류를 벗어나 문화생활을 동시대적으로 접할 수 있던 표상과 같았던 그 극장에서 <언더 씨즈 2>를 보게 된다. 어떻게 하면 비디오 가게 아가씨에게 말을 걸어 볼까, 고민하던 무렵이었다.
나는 <언더 씨즈 2>를 보는 순간, 그의 태평양처럼 넓은 이마와 연기가 아예 증발해버린 무표정, 그리고 뱀처럼 날카롭게 찢어진 눈에 반했다. 그리하여 <언더 씨즈 2>를 본 뒤에 비디오 가게를 뒤져, <형사 니코>, <복수 무정 1. 2>와 <언더 시즈 1>, <죽음의 땅>를 차례로 빌렸다. (물론 다른 비디오 가게에 가서 파마머리 아줌마한테 빌렸다.)
그는 어느 곳에서나 외로이 적과 맞선다. 도와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나라면 분통이 터졌을 거 같은데, 그는 어떤 역경 속에서도 당연히 이럴 줄 알았다는 듯이 한결같은 태도를 취한다. 그는 사실 엄청난 가라테의 계승자다. 이미 모든 적들의 동작, 암계, 전술을 꿰뚫고 있었다. 그리하여 그는 영화의 사실성, 개연성, 합리성의 압박 속에서도 자신의 신비한 무공을 꿋꿋하게 드러낸다.
솔직히 시걸이라고 해서 무서운 적이 없었을까? 하지만, 그의 얼굴은 언제나 신뢰의 표상이다. 삼십 대 일로 싸울지라도 주름 한 번 찡그려본 적이 없다. 그는 나에게 스승이었고, 귀감이었다. 나는 지금도 그 백화점 극장에서 본 <언더 씨즈 2>의 한 대사를 기억하고 있다.
영화 속에서 우리의 시걸은 하필이면 재수 없게도 테러리스트들이 탈취한 기차에 타고 있었다. 사태의 심각성을 바로 알아본 시걸이 사건 본부에 연락을 취한다. 본부의 무능한 관리들은 우왕좌왕하다가 시걸의 전화를 받고는 안심한다. 케이시(시티븐 시걸 역)만 있으면 돼! 하지만 바로 이어서 누군가 중얼거린다. “근데, 왜 케이시는 그 기차에 탔대?”, 그리고 이어지는 부관의 대답.
“지, 팔자죠 뭐.”
아. 이것이 바로 쿨이다. 쿨한 시걸. 그는 팔자대로 사는 인간이다. 언제나 지옥과 같은 현장에는 그가 있다. 재수도 억수로 없는 사람이지만, 불만을 터트린 적도 없다. 그리하여 늘 사건에 휘말리면서도 마치 ‘팔자’인 양 체념하지도 않는다. 특유의 하면 된다는 정신력과 황소 열 마리를 짊어진 듯한 배짱과 벌판을 품은 듯한 낙관주의-관객 여러분 걱정 마세요. 아무리 이야기가 꼬여도 100분 안에는 끝날 거예요. 난 러닝타임은 지킨다고요-의 사나이다.
처음 영화를 봤을 때, 나는 흥분을 감추지 못하고 새끈거렸다. 떨리는 마음을 주체할 수 없어서, 화장실로 뛰어갔다. 그때, 내 뒤로 시걸이 등장했다. 엘비스 프레슬리의 노래를 흥얼거리며, 그림자처럼 서 있었다. 나는 시걸에게 그만 고백을 하고 말았다. “시걸, 당신은 완벽해요. 하지만, 나는 쓰레기예요. 나는 별종이에요. 왜 나만 이런 지옥에 있는 걸까요?” 시걸은 그냥 웃기만 했다. 그리고 손가락을 딱하고 튕기며, “넌 멋져, 난 널 좋아해”라고 말하고 사라졌다.
그 뒤, 시걸은 잊을 만하면 나타났다. 여전히 변하지 않는 채로, 변하지 않은 연기(대체 그 수준의 연기를 그 상태로 유지하기 위해서 그는 얼마나 많은 노력을 했을까?)와 그와는 반대로 갈수록 정수를 뽑아가는 무공(그는 한두 번의 합으로도 적을 제압하는 초절정의 손가락 무공도 쓰게 되었다)을 펼쳐 보였다.
하지만 우리 사이에도 겨울은 왔다. 사실 아무리 시걸이라 해도, 이성에 눈을 뜬 스무 살의 남자를 이길 수는 없었으니까. 나는 시걸을 멀리하고 여자와 가까이하려 노력했다. 하지만 아무리 아름다운 여자라 해도, 해 지기 전에는 헤어지곤 했다. 밤길에 깡패를 만나면 무서웠기 때문이다. 여자애들은 처음엔 의아해했다. 보통 남자들이란, 깊은 밤이 되어도 집에 들여보내지 않으려 하지 않나? 그럴 때마다 나는 신사답게 아빠 미소를 짓긴 했지만, 그 친구들도 눈치는 있는 법. 나는 다시 외톨이가 되었다. 그리하여 다시 시걸을 찾을 수밖에 없었다.
시걸은 여자 따위는 아무것도 아니라고 나에게 말했다. 무공의 고수가 되면, 아름다운 여자보다 더 소중한 명예를 얻는다고 말했다. 나는 믿지 않았다. "전 여자가 좋아요, 인기가 많았으면 좋겠어요." 그러자 시걸은 자신의 말을 몸소 증명해 보였다. 아무리 도도한 여성이라도, 시걸이 악당 몇 놈을 상대로 (대개는 흑인이거나 아랍인이었고, 백인은 잘 없었다!) 대충 목 좀 꺾어주고, 팔 좀 비틀어주면, 어김없이 크레디트가 올라가기 전에 시걸에게 찰싹 붙어버렸다. 그리고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고 한다. (이 말은 나중에 시걸에게 들었는데) ‘당신 팔뚝에 목 졸리고 싶어라’
시걸은 항상 최고였다. 그뿐만이 아니다. 오감을 흔드는 그의 연기는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그리고 1년에 몇 편씩이나 영화를 찍는 꾸준한 스테미너.
하지만 시걸에게도 근심은 있었다. 그의 최대의 라이벌 때문이었다. 라이벌이라니. 도대체 이 남자에게 라이벌이 있던가? 있었다. 아주 강력한 라이벌. 바로 느끼한 녀석 장 끌로뜨 반담이었다. 그 녀석은 시걸에게 뒤지지 않는 연기와 무공을 선보이면서, 시걸과 거의 흡사한 이야기 구조와 사건과 내러티브를 구사했다. (연기를 지워버린 무표정도 비슷했다!) 아무리 적이지만, 시걸조차도 존경하고 인정한다고 했던 유일한 상대였다. 시걸이 말했다. “내가 만약에 불의의 사고로 죽게 된다면, (여기서 나는 "절대 그럴 일이 없어 시걸"이라고 말했고, 시걸은 살짝 입을 비틀어 "물론, 알아"라고 말했다. 저 자신감이라니!) 가장 많이 혜택을 받을 만한 놈이지”라고 말했다. 그랬다. 세계를 양분하는 두 사람이다 보니, 한 사람이 남았을 경우에 혼자서 세계를 짊어지게 될 수밖에 없었다. 나는 시걸에게 물었다. “장 끌로드 반담을 이길 수 있을까요?” 이 질문은 시걸을 화나게 했다. 그는 자기의 기름진 머릿결을 보여주었다. “이 머리카락을 다 풀면, 난 기름 채찍이라는 무기를 갖게 되는 거지.” 그렇다. 반담은 게임이 안 되는 상대였던 것이다.
그리하여 시걸은 늘 같은 캐릭터를 지키고 있다. 언젠가 본인도 나에게 말했지만, 수십여 년을 한결같이 똑같은 모습으로 등장하는 건 힘든 일일 것이다. 어쩌면 조선시대 선비의 절개가 이런 걸까? 게다가 그는 코미디나 드라마는 절대로 할 생각이 없다고 입버릇처럼 말하고 있다. 그래서 나는 시걸이 좋다. 이렇게 배신과 변절이 판을 치는 이 시대에 (로버트 드니로의 말년을 보라. 대체 뭐냐?) 그는 꿋꿋하게 자신의 영역을 지키고 있다. 시걸이라고 해서 슬픈 일이 없었겠는가? 무서운 일이 없었겠는가? (그래도 <클레멘타인>은 힘들었다고 고백했다. 나는 심심한 위로를 전했다.)
그리고 언제나 한결같은 표정으로 악당들을 쳐부순다. 그건 올드 팬들을 위한 봉사정신인 것이다. 그리하여 시나리오가 아무리 엉망인 영화라도 기꺼이 출연하고 있다. 그라고 해서 액션 영화로만 소비되고 싶지는 않을 것이다. 명작에 나와 오스카상도 받고 싶을 것이다. 하지만 자신을 기억하는 팬들을 위해, 늘 희생하고 있다. 이런 마음을 유지하기 위해 그는 심지어, 영화 밖에서도 일관된 캐릭터를 유지하고 있다. (어쩌면 푸틴을 지지하는 것도 그런 이유일 것이다)
이렇게 그는 고집 있는 예술가이다. 사람들이 그를 가리켜 멋대가리 없는 맨손 배우라고 욕을 해도 그는 절대 아랑곳하지 않는다. 사람들이 욕하고 비난하고 등을 돌려도, 아무도 보지 않는 스크린 속에서 최선을 다해 자신의 할 일을 하고 있다. 쿨하게, 표정 하나 변하지 않고. 언제나 똑같은 미용실을 이용하면서.
나는 그런 시걸을 신뢰한다. 신뢰하지 않을 수가 없다. 세상 누구도 그렇게 연기를 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아무도 시걸처럼 늘 똑같은 표정과 헤어 스타일을 유지할 수 없을 것이다. (이렇게 일관된 연기를 하려면 로봇 정도는 되어야 한다) 게다가 아무리 욕을 먹어도 비슷한 영화만 출연하는 결기까지 가졌다. 초지일관, 굳은 심지를 가지고 꿋꿋하게 걸어간다. 대단하다. 멋있다. 끝내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