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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솔라리스의 바다 Aug 06. 2022

마틴 에덴

사나운 마음을 가진 사람을 위하여

피에르토 마르첼로 감독의 <마틴 에덴>을 봤다. 마치 실화를 다룬 듯 인물의 변화와 성장이 인상적이었는데, 110년 전 잭 런던이 쓴 소설 『마틴 에덴』이 원작이라고 한다. 110년 전 소설이라니, 이건 각색이 좋았다고 할 밖에 없다.


사실 나는 색감이나 풍경이 너무나 예스러워서 이탈리아 네오리얼리즘 시대의 영화까지는 아니더라도 80년대 이탈리아 영화가 아닐까 싶었다. 2019년 작품이라고 하니, 미술도 잘했나 보다. 그리고 남자 배우는 연기도 참 잘했는데, 베를린영화제에서 남우주연상을 받았다고 한다. 아, 결국 이 연출자는 모든 것을 해냈구나. 부럽다. 멋있다. 모르고 보지 않았으면, 골라서 보지 않았을 영화였는데, (나는 전기영화를 좋아하지 않는다) 보고 나니 잘 봤다는 생각이 든다.


이 영화는 소설가 마틴의 이야기다. 각고의 노력 끝에 작가, 저명한 작가가 되지만, 결국 자기 자신을 파괴하고 만다. 그런 캐릭터를 담았다. 개인주의자가 제도권 안으로 들어가면서 자기 성품과 충돌하고 마는 비극을 그렸다. (이건 마치 <성난 황소>(마틴 스콜세지, 1980)의 주인공 같다.)


내가 보기에 마틴이라는 사람은 (스스로 밝힌 것처럼) 개인주의자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개인주의자이고 싶은 마틴은 시대의 흐름 때문에 무정부주의자 같은 개인주의자가 된다. 그리고 여자 친구가 초대한 저녁식사에서 그 부르주아 가족들에게, 그리고 판사에게 말하는 장면을 보노라면, 개인주의자로 살고 싶었는데도 어쩔 수 없이 사회주의자가 될 수 있겠구나, 하는 생각도 들었다. (사실 무슨, 무슨 주의자가 무슨 상관일까 싶지만.)


매혹적이다. 파괴적이다. 그렇다. 퇴폐미다.

마틴은 부와 명성을 얻게 된다. 그리고 그런 자신을 싫어한다. 마치 자기 소망과 상관없이 음반이 많이 팔리고, 거물이 되어 버린 커트 코베인이 스스로를 싫어했듯이. (그리고 자살했듯이) 이건 섹스 피스톨스 시대의 펑크가 주류 장르가 될 수 없는 이유와 같다. 만약 다다이즘이 오랜 전통을 가진다면 그 얼마나 꼴사나울까? 마틴은 그런 사람이다. 자신을 불사르는 사람이다.


하지만 그래도 자신이 사랑했던 여자들에게는 친절했어야 하지 않을까? 부인이 된 사람에게도, 뒤늦게 찾아온 연인에게도. 그렇게 심하게 대할 필요는 없었다고 생각하지만, 남의 사정이니 또 뭐라 하기도 그러네.


마지막으로, 


나는 그가 마침내 작가가 되는 장면이 참 좋았다. 흔히 해뜨기 직전이 가장 어둡다고 하는데, 수많은 원고가 퇴짜를 맞고, 연인과 다투고, 아프기까지 한데, 반송된 우편물의 마지막 답변-출간에 대한 답변을 들을 땐, 마치 내 일처럼 기뻤다. 아는 사람은 알 거다. 그리고 나도 알고 싶다. 


아직은 모르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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