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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솔라리스의 바다 Aug 28. 2022

배니싱 포인트

끝내 석양으로 사라진 고독한 사나이 

<배니싱 포인트>(리차드 C. 사라피안, 1971)는 기묘한 영화다. 


처음부터 파멸을 작정하고 달리는 기분이 들기 때문이다. 상업영화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발단, 주인공의 목표, 숨은 사연 같은 게 없다. 플롯도 강력하지 않다. 그저 자동차를 타고, 달리고, 달리고, 달리다가 죽는다. 굉장히 불친절한데, 그래도 쿨한 남자를 만난 것 같은 낭만을 준다. (*boxofficemojo에 따르면, 이 영화는 북미에서 12,443,673달러를 벌어들였다. 제작비가 안 나와 있어서 흥행했는지 아닌지는 모르겠다.)



영화는 금요일 밤, 배달을 마치고 돌아온 코왈스키(베리 뉴먼)가 회사를 재촉해 다음 배달을 나가는 것으로부터 시작된다. (극 중 코왈스키는 자동차 배달부다) 배달을 위해, 콜로라도의 덴버에서 캘리포니아의 샌프란시스코까지 15시간 안에 도착해야 하는데, 친구들은 미친 짓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코왈스키는 시속 250km까지 달릴 수 있는 자동차와 스피드라 불리는 각성제를 먹고는, 밟는다.


(스포 있음)


과속으로 달리던 코왈스키가 교통경찰에게 걸렸을 때, 나는 그러려니 했다. 하지만 코왈스키는 멈추지 않았다. 오히려 경찰을 따돌리고, 달린다. 누가 봐도 의심스러운 장면이다. 경찰도 마찬가지다. (게다가 자존심도 뭉개졌다) 코왈스키는 고속도로 순찰대를 따돌리고, 바리케이드도 여러 번 뚫는다. 그렇게 눈덩이가 커지듯, 사건이 커진다. 약이 오른 경찰들은 코왈스키를 잡기 위해 집결한다. 


영화의 마지막, 코왈스키는 경찰들이 세워놓은 거대한 불도저 바리케이드를 본다. 잠깐 미소를 짓는 듯하더니, 바리케이드로 돌진한다. 그리고 불타오른다. 영화 속 사람들은 놀랐지만, 나는 놀라지 않았다. 이건 예정된 것처럼 보였으니까. 아마도 코왈스키 내부의 어떤 고독이, 외로움이, 쓸쓸함이 그를 소실점(vanishing point)으로 이끌었다고 생각한다. (그건 조금씩 등장했던 그의 과거 조각을 조금씩 이어 붙여 유추해 볼 뿐이지만.)


사실 이 사람이 무엇을 배달하는지, 왜 그토록 각성제를 먹고 과속을 하면서까지 목적지로 가야 하는지 드러나지 않는다. 배달보다도 경찰차의 추격, 그 추격을 뿌리치는 모습이 더 중요할 뿐이다. 그리고 영화의 중간, 코왈스키가 경찰을 피해 네바다 사막에 들어섰을 때는, 그 황량함과 고독감이 최고조에 이른다. 황무지에는 코왈스키가 탄 차의 바퀴 자국만 이어진다. 그는 과연 어디로 가는 것인가? 아니다. 그는 갈 곳이 없는 것이다. 어디도 갈 수 없었다. 처음부터. 


이미 종말을 예견할 수 있는 영화. 지평선 끝으로 가고 싶은 코왈스키. 파멸을 향해 달리는 자동차. 우리는 그를 따뜻한 마음으로 위로할 뿐이다. (중간에 그를 도와줬던 사람들도 비슷한 마음으로 바라봤을 것이다.)


이 영화에는 히피의 흔적이 자주 등장한다. 1960년대 히피 문화는 당대의 시대정신이었다. 그러나 1970녀대가 되면서 미국 사회는 급속도로 보수화되었고, (늘 반작용이 있다) 히피문화는 사그라들었다. 흔히 <이지 라이더>(데니스 호퍼, 1969)를 가리켜, 1960년대 히피 문화의 종말을 담은 영화라고 한다. 그 영화의 결말을 생각하면, 1960년대의 자유롭고 방종한 청년들에 대한 기성세대(혹은 보수주의자)의 적개심이 얼마나 컸던가를 알 수 있다. 


그렇다면 <배니싱 포인트>(1971)의 코왈스키는 어떨까? 그는 히피가 아니었다. 오히려 히피 문화의 반대편에 있었다. (베트남 전에 참전한 군인이며, 경찰로 근무하기도 했다) 하지만 이제는 거꾸로 사회의 강력한 제도를 무시하려 든다. 그의 유일한 죄목은 '과속'인데, 마치 사명을 가진 사람처럼 과속(과 경찰 따돌리기)을 계속하려 한다. 그러는 그의 눈을 통해 히피의 잔재를 볼 수 있다. 오토바이 폭주족들, 외딴곳에서 종교활동을 하는 사람들, 자신들의 오두막에서 여전히 히피처럼 자유롭고 싶은 사람이 등장한다. 그리고 그들은 마치 철 지난 해수욕장에 남은 사람들처럼 보인다. 


이들과 코왈스키는 기존 체계를 거부한다는 점에서 비슷해 보이기도 하다. 더구나 코왈스키 또한 60년대의 잔재인 것도 맞다.


그러나 코왈스키는 역사의 뒤안길에 남겨진 히피가 아니라, 한때 자신이 믿었던 것으로부터 멀어지고, 사랑하는 사람을 잃은 뒤, 자기 인생에서 버려진 사람과 같다. 나는 이 영화의 불친절한 서사 속에서도, 코왈스키의 공허함은 결국 사랑하는 여자의 부재 때문일 거라고 믿는다. 그리고 이건, <매드 맥스>(조지 밀러, 1979)에서 아내와 아이를 잃고 복수를 위해 떠났던 맥스(멜 깁슨)에게서도 나타났던 표정과도 비슷하다. 


그렇다. 남들이 뭐라 하건, 아무것으로도 채울 수 없는 공허함이 있기 마련이다. 그리고 이렇게 가을이 왔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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