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트 코베인이 생각나는 식목일 밤
아주 오래전, 식목일에 있었던 일이다.
그날 나는 할 일 없이 종로를 배회하고 있었다. 지금과 달리, 당시의 종로는 활기가 넘쳤다. 사람들이 많았고, 모두 좋아 보였다. 나는 낙원상가로 향했다. (아직 서울아트시네마가 낙원 옥상에 있을 때였다) 극장에서는 <존 휴스턴 특별전>이 열리고 있었다.
나는 <죽은 자들(The Dead)>(존 휴스턴, 1987)를 봤다. 이 영화는 제임스 조이스의 <더블린 사람들> 속 <죽은 자들>이라는 단편이 원작이었다. 게다가 존 휴스턴의 딸 안젤리카 휴스턴이 나온다. 일찍이 <아담스 패밀리>의 팬이었던 터라 그녀의 다른 캐릭터를 보는 것도 흥미로웠다. (한창때의 안젤리카 휴스턴은 굉장히 매혹적이다.)
창비 문고판으로 읽었던 <더블린 사람들>. 사실은 <율리시즈>와 마찬가지로 내용이 전혀 기억나지 않는다. 그래서 영화는 마치 처음 보는 것처럼 재미있었다. (그리고 고질병처럼, 중간에 10분은 졸았다) 존 휴스턴은 <말타의 매>(1941)로 필름 누아르의 문을 열더니, <미스터 앨리슨>(1957)에서는 로맨스를 맛깔나게 그려냈고, <용서받지 못할 자>(1960)에서는 서부극을 매끄럽게 연출했었다. 그리고 이 초현실적인 의식의 흐름에 기댄 원작을 이토록 세련되게 풀어내다니. 87년이면, 그도 상노인이었을 텐데... (알고 보니, 이 영화는 감독의 유작이었다.)
이 영화의 핵심은 후반부 거의 엔딩에 이르러 밝혀지는 아내(안젤리카 휴스턴)의 첫사랑에 대한 사연과 남편의 질투, 그리고 잠든 아내를 바라보던 남편의 "내레이션"에 있다. 영화는 앞서 파티 장면에 거의 모든 시간을 할애하고, 나머지는 파티 후 돌아가는 사람들, 그리고 남편과 아내의 침실 장면으로 끝을 맺는 식이다.
집에 돌아온 아내는 갑자기 슬피 운다. 무슨 일일까? (나도 궁금했다) 사실, 파티에서 한 성악가가 <오그림의 처녀>라는 노래를 불렀다. 그녀는 그 노래가 생각이 나서 울었다고 한다. 무슨 추억이 있길래? 아내는 이윽고 옛날이야기를 꺼낸다. 그녀가 어렸을 적에 17살짜리 소년과 친밀하게 지냈다고 한다. 소년은 아름다운 목소리를 지녔는데, 가끔 <오그림의 처녀>라는 노래를 불러주곤 했다. 하지만 소년은 허약했고, 결국 17살에 죽었다.
젊어서 죽는 건 얼마나 슬프고, 또 끔찍한 일일까?
죽은 사람도 불쌍하지만, 남아 있는 사람들에게 깊은 슬픔을 남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 슬픔이 무뎌지고, 결국 생활로 돌아가지만. 그녀도 마찬가지다. 잊었다고 생각했는데, 수십 년이 흐른 뒤에 그 노래를 들었을 때, 기꺼이 반응하고야 마는 추억을 간직하고 있었다. 거기에는 충분히 살지(누리지) 못하고, 너무 일찍 죽은 사람들에 대한 동정과 미안함이 섞여 있던 것이다.
아내는 하염없이 울면서 지난 이야기를 하고, 남편은 (바보처럼) 질투심에 불탄다. 이윽고 아내가 슬픔과 피곤에 지쳐 잠이 들었을 때, 남편은 창밖에 내리는 눈을 바라보며, 길고 긴 독백을 한다. 그때 나는 내 눈과 귀를 의심했다. 남편의 독백 한 자락에는 너바나의 커트 코베인이 쓴 유서에 적힌 말과 똑같은 말이 나왔기 때문이다.
"서서히 사라지는 것보다는 한 번에 불타버리는 것이 낫다."
커트 코베인은 겨우 27살에 죽었다. 죽기에는 너무 어린 나이였다. (영화 속 그 소년처럼 말이다.) 커트는, 얼마나 속상한 일이 많았으면, 귀여운 딸도 두고 가버렸다.
내가 <죽은 자들>을 본 날은 식목일이었다. 그리고 커트 코베인은 (사망 추정 시각에 따르면) 4월 5일에 죽었다. 식목일의 밤, 커트 코베인의 유서와 똑같은 문장이 나오는 <죽은 자들>을 보면서, 나 또한 영화 속 소년을 추모하고, 안젤리카 휴스턴이 맡았던 인물의 슬픔에 공감했다. 그리고 텅 빈 극장 한 구석에서 커트 코베인을 떠올리고, 커트 코베인을 좋아했던 누군가를 기억하고, 커트 코베인과 똑같이 27살에 죽은 내 친구를 떠올렸다.
죽기에는 너무 이른 나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