옥탑방의 수상한 비디오 가게

그곳엔 모든 비디오테이프가 복사본이었지

by 솔라리스의 바다

90년대 중반, 영화가 뜨거운 콘텐츠로 떠오르던 시절의 이야기다.


95년 초에 '시네필'이라는 격주간지가 등장했고, 이어서 '씨네21'이 나왔다. 그리고 정성일의 '키노'가 등장했다.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의 <희생>(1986)이나 장 자크 베넥스의 데뷔작 <디바>(1981), <중경삼림>(왕가위, 1994) 같은 영화가 코아아트홀에서 상영되던 때기도 했다. 골목마다 비디오 대여점이 생겨났으며, (전국에 35,000개의 대여점이 있었다고 한다) 대학가를 중심으로 영화감상회라든지 영화 공부모임 같은 게 유행했다. 그리고 홍대 주변에는 일본 애니메이션을 틀어주는 카페('블랙 마리아'였던가?)가 속속 등장했다. (영화뿐이었을까? 백 스테이지나 드럭 같은, 음악 카페나 클럽도 생겨날 무렵이었다. 바야흐로 문화의 시대였다.)


홍대 정문에서 시작되는 메인 도로 길가에 이상한 입간판이 생긴 것도 이 무렵이었다. 엘리베이터도 없는 건물의 4층인가 옥탑방에 일종의 비디오 대여점이 있었다. 구불구불한 계단을 걸어 올라가면, 가게가 나온다. 멀리 책상에 주인장이 앉아 있고, (한 번도 제대로 된 대화를 해본 적은 없다) 비디오테이프는 모두 복사본이었다. (하얀색 바탕에 검은 글씨가 쓰인 비디오테이프로 가득한 방에 서 있는 것도 묘한 경험이긴 했다.)


나는 1~2년 정도 그곳을 다니면서 영화를 빌려보곤 했다.


몇몇 기억나는 영화가 있다. 이를테면, <기차의 도착>(뤼미에르 형제, 1895). 세계 최초의 영화라는 <기차의 도착>을 거금 2,500원을 주고 빌렸다. (1만 원을 내면 4개의 테이프를 빌릴 수 있는 구조였다. 연회비인지 가입비인지는 별도였고) 기대를 잔뜩 하고는 집에 와서 <기차의 도착>을 본 뒤, 그 실망감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40초 남짓, 그야말로 플랫폼에 기차가 도착하는 장면으로 끝이 났다. (반납하기 전에 10번은 돌려본 것 같다.)


img.jpg <기차의 도착>은 뤼미에르 형제가 지은 제목이 아니다. 나중에 역사가들이 영화 내용에 맞춰 '분류'한 것이다.

그리고 <도그 스타 맨>(스태 브래키지, 1964)도 기억난다. 매우 유명한 실험영화라는 이름에 홀려 영화를 빌렸는데, 영화 내내 필름을 긁은 것 같은 이미지와 알 수 없는 이미지의 조합이었다. 그때 나는 중간에 졸거나 화장실에 가거나 해서 한 장면이라도 보지 않으면 영화를 다 본 것이라고 할 수 없다는 신념이 있었기에, 이 어지러운 이미지 실험을 끝까지, 눈을 떼지 않고, 모두 봤다. (지금 정보를 찾아보니, 세상에, 78분짜리다) 이후 일주일 정도는 잔상효과 때문에, 눈을 감아도 별 같은 게 계속 보였다. (그래서 잠을 자기 어려웠다.)


96695a3c755c45b6b73543dff4989abc1556189038073 오랫동안 <도그 스타 맨>이라는 영화 제목과 스웨이드의 <도그맨스타> 앨범 제목을 헷갈려했다.

한 번은 그곳에서 공포영화제 같은 걸 했다. 아니면 데이빗 린치 상영회거나. 나는 티켓을 끊고 그 상영회에 참가했다. 상영관은 가게 옆에 있는 작은 공간이었다. (아마도 탕비실이었을 것이다) 커튼을 열고 들어가니, TV와 비디오 데크 그리고 2~3인용 소파가 있었다. 거기가 상영회 장소였던 것이다.

나는 그 작은 공간에서 <이레이저 헤드>(데이빗 린치, 1977)를 봤다. 데이빗 린치가 순전히 "관객을 불쾌하게 만들고 싶어서" 만들었다는 <이레이저 헤드>는 정말로 불쾌하고 지루한 영화였다. 그것도 모르는 사람과 함께 소파에 앉아서. (내가 들어갔을 때, 나 말고 다른 남자 한 명이 소파에 앉아 있었다)

영화 시작 전, 영화에 관한 어떠한 설명도 없었고, 갑자기 영화를 상영했다. 함께 있던 그 분과 나는 굉장히 어색하게 앉아서 영화만 봤다. (졸면 더 어색할 것 같아서, 허리를 꼿꼿이 세우고 영화에 집중했다. 소파는 너무 딱딱하고 불편했다. 커튼 밖으로는 사람들이 비디오를 빌리러 왔다 갔다 했고.)


15ebc9b027965cec3f63deb8fed9ae543fc6b583 나는 그때 <이레이저 헤드>를 본 뒤, 다시는 이 영화를 보지 않았다.

나 말고도 그 비디오 가게를 다니던 사람이 있었다. 소문에 의하면, 주인장은 모 대학교 영화과 출신인데, 비싼 등록금이 아까워서 졸업하기 전에 영화과에 있는 비디오테이프를 모두 빌려다가 복사본을 떴다고 한다. 그리고 이 가게를 차린 거라고. 그렇다면, 그곳에 있던 모든 테이프가 복사본인 게 이해가 된다. (거꾸로, 복사본으로 가득한 가게를 보고 나중에 만들어진 소문일 수도 있다.)


그곳 주인장은 굉장히 무뚝뚝했다. 나는 그에게서 대답 한 번 제대로 들은 적이 없었고, 눈을 보며 말을 해본 적도 없다. 언제나 책상에 앉아 뭔가를 하고 있었다. (늘 앉아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텅 빈 가게에서 비디오 목록을 들여다보고 있는데, (나는 마침 출입문 쪽에 있었다) 계단에서 '또각또각' 하이힐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아름다운 여성 두 분이 들어오는 순간, 나를 밀치고 여성들에게 달려간 사람이 있었다. 주인장이었다. 나는 그의 다리를 처음 봤다. 그리고 그렇게 말이 많은 사람인지도 처음 알았다. 그때 손님들에게 추천한 영화가 이와이 슌지의 <러브레터>(1995)였다. 어찌나 싹싹하게 설명을 해주던지, 나도 옆에서 귀동냥을 하고 말았다. 주인장은 내가 가게를 나서며 인사를 하거나 말거나 계속해서 여성분들을 따라다니며 영화에 관한 설명과 추천을 곁들였는데, (그때) 부디 잘 됐기를 바란다.


261E594E50F4E60326 나는 괜히 이 영화가 싫어서, 나중에서야 봤다. 이 멋진 영화를 말이다.

결국, 그곳은 몇 년인가 운영되다가 사라졌다. 듣기로는, 옥탑방에 그런 공간을 차린 것 자체가 무슨 규정 위반이라서 단속이 있었다고 한다. (모든 게 다 소문이라, 진위는 알 수 없다.)


나는 다양한 곳에서 영화를 봤다. 영화만큼이나 영화를 보는 공간도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가끔은 영화보다도 장소가 혹은 상황이 더 기억날 때가 있다. 영화를 보는 것이란, 이런 모든 것을 보는 것이다. 그때의 기분, 친구의 모습, 내 마음의 상태, 그런 것들이 담겨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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