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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솔라리스의 바다 Nov 13. 2022

스팀보이

막판 스파트로 단숨에 결승테이프를 끊어버리는! 

살랑살랑 시원한 밤바람이 창문 너머 내 방을 노크하는 이 밤. 나는 <스팀보이>(오토모 가츠히로, 2004)에 대해 말하지 않을 수 없다. 그 기운과 욕심과 폭주가 너무나 사랑스럽다. 


나는 <스팀보이>를 보면서, 감독의 전작 <대포의 거리>(1995)가 생각났다.

사실 전반부까지는 별로였다. 심지어 '아니올시다'라고도 말할 수 있었다. 게다가 은근히 <천공의 성 라퓨타>(미야자키 하야오, 1986)와 닮아있었다. 그래서 오토모 가츠히로가 14년간 이 애니메이션을 만들면서, 돈과 시간은 물론 이야기까지 다 갖다 버린 건 아닌가 하는 생각까지 했다. 정말이다. 전반부는 끔찍하다. 사실, 전체적으로 봤을 때도 스토리 자체는 괴롭다. 


하지만 후반부는 그렇지 않다. 특히 끝나기 전 30분의 폭주 시퀀스는 어떤 애니메이션과도 (혹은 어떤 영화와도) 바꾸지 않을 대단함의 연속이다. 그야말로 압도적인 스케일과 감독의 욕심이 작렬하고 있다. 완전 폭주기관차 같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이야기는 별로다. 시종일관 초등학교 저학년 공상과학 만화책에나 나올 법한 내용이지만, 후반부의 이 폭주 장면 때문에 모든 걸 용서하기로 했다. 2시간 동안 지지부진하게 진행된 템포의 원수를 갚는 듯, 막무가내로 폭발하는 전개는 정말 대단했다. 아, 저 욕심, 욕심, 욕심, 고집, 고집, 고집... 멋지다. (찬사)


<아키라>와 <스팀보이>는 폭주의 영화다.

이렇게 <스팀보이>는 막판 스파트로 단숨에 결승테이프를 끊어버리는 놀라운 작품이다. 극 중 레이의 아버지 에디의 대사는 마치 오토모 가츠히로의 말을 대변하는 것 같다. 


"이 성이 날아오르는 순간, 꿈은 실현됐습니다. 이 성을 본 많은 사람들이 다시 똑같이 이 성을 만들어 낼 거니까요."


(대사 내용의 디테일은 차이가 있지만) 이 말은 오토모가 전 세계의 예술가들에게 염장을 지르는 말처럼 들린다. '나는 이만큼 했으니, 이제는 너희가 나를 밟고 가라. 할 수 있다면...' 같은 도발이자 (그래 봤자 나를 따라올 순 없을 거라는) 자신감의 표현이다. 이걸 성취하기 위해 얼마만큼 자신을 괴롭혀야 했을까? 어쩌면 자신을 갈아서 작품을 만드는 예술 변태일지도 모르겠다.

 

마지막 엔딩은 크레딧 롤이 올라감과 동시에 후일담을 스틸 형식으로 보여주고 있다. 마지막 스틸. 서 있는 레이의 모습. 살짝 미소 짓고 있는 그의 얼굴은 흡사, '아키라'의 그 미소와 같다. 폭주를 기다리는 레이. 악마의 미소.

 

스팀성은 라퓨타나 하울의 움직이는 성과 비슷하지만 다르다. 

<스팀보이>를 보는 순간, 아니 마지막의 '스팀성' 시퀀스와 만나는 순간, 미야자키 하야오와 오시이 마모루와 전혀 다른 세계를 창조한, 그리고 어떤 면에서는 그들을 뛰어넘은, 오토모 가츠히로의 경지를 느낄 수 있었다. 이 사람은 고작 두 개의 작품만으로도 세계를 평정했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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