캐롤코 픽쳐스의 추억
<토탈 리콜>(폴 버호벤, 1990)은 언제나 즐겁게 볼 수 있는 영화다. SF, 액션, 미스터리, 반전, 매력적인 배우. 그리고 기억에 관한 영화이기도 하다.
주인공 퀘이드는 필요에 의해서 기억을 삭제한 인물이다. 그런데 여기서 이야기가 엇갈린다. 원래 나쁜 놈이었지만 정의의 편에 서기로 했다는 증언과 원래 나쁜 놈이었고, 정의의 편에 선 것처럼 위장해서, 정의의 편을 날려버리려고 했던 정말 나쁜 놈이라는 증언이 뒤섞여 있다.
하지만 누구의 말이 맞는지는 모른다. 왜냐하면, 정작 본인은 전혀 기억을 못 하니까. 그래도 (영화니까) 정의의 편에서 나쁜 놈들을 무찌른다. 그런데 만약에 진짜로 후자의 말이 사실이었다면, 나쁜 놈들 편에서는 기가 찰 노릇일 것이다. 기껏 애써서 언더커버로 보냈더니, 기억을 잃고는 거꾸로 이쪽에 총질을 한 모양새다. 그렇다면, 바보도 저런 바보가 없다.
이렇게 진짜 기억과 가짜 기억이 뒤섞인 SF 영화는 언제나 재미있다. (필립 K. 딕 원작 소설을 영화로 만들었다. 그러고 보니, 필립 K. 딕은 기억에 관한 소설이 많다) 오랫동안 기억은 자아정체성을 판단하는 기준으로 사용했는데, 그 기억마저 조작되거나, 잃어버릴 수도 있다고 생각하니 더 흥미진진했던 것 같다. (내가 좀 어릴 때였다.)
하지만 이 영화를 다시 보면서, 새삼 느꼈던 건 이쪽 장르, 즉 SF, 액션, 마초(혹은 누아르), 그리고 B급에 대한 나의 애정이었다. 물론, B급이라고 해서 저예산은 아니다. (B급은 원래 비주류, 저예산 영화를 뜻하는 말이었다) 박스오피스모조에 따르면, 제작비는 6천500만 달러로 (비슷한 시기에 개봉했던 <다이 하드 2>의 제작비가 7천만 달러였다) 나름 블록버스터급 영화였다. (참고로 <토탈 리콜>의 북미 수익은 1억 2천만 달러였고, 그 밖의 나라에서 1억 4천만 달러를 버는 등, 총 2억 6천만 달러의 흥행 수익을 올렸다.)
나는 <토탈 리콜>의 장르성이 참 좋다. 생각해 보면, 이 영화를 만든 캐롤코 픽쳐스 영화들은 대부분 비슷한 장르였다. <람보> 시리즈가 나왔고, <터미네이터 2>도 캐롤코 영화다. 실베스터 스탤론이 출연한 <클리프 행어>, 그리고 미키 루크의 <엔젤 하트>와 샤론 스톤의 <원초적 본능>도 있다. 캐롤코는 80년대부터 90년대 초반까지 잘 나가는 준메이저였지만, <컷스로트 아일랜드>(레니 할린, 1995)를 마지막으로 문을 닫았다.
캐롤코 영화의 대부분은 극장에서 봤지만, 비디오로 다시 본 영화도 많다. 캐롤코의 영화들은 편안한 마음으로 빌려와 따뜻한 방에서 귤을 까먹으며 볼 수 있는 영화들이었다. 심각하지 않고, 심심하지도 않다. 천연덕스러운 촌스러움과 순진한 마초들, 그리고 폭력과 에로틱. 특히, 폴 버호벤은 탁월했다. <로보캅>, <토탈 리콜>, <원초적 본능> 그리고 <스타쉽 트루퍼스>까지, 종횡무진하며 장르적 쾌감을 토해냈다.
영화를 보다가 옛날 생각이 나서, 그냥 쭉 옛날 생각만 했다. 그 시절의 아날로그 특수효과가 그립다. 아날로그 액션과 어설픈 세트가 그립다. 정교하지 않은 선 굵은 내러티브가 그립다.
아니, 어쩌면 그냥 어린 시절이 그리운 건지도 모르겠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