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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솔라리스의 바다 Dec 21. 2022

천국보다 낯선

포스터보다 낯설었던 짐 자무쉬의 영화

얼마 전, <망각의 삶>(1995)의 연출자 톰 디칠로에 대해 알아보다가, 그가 짐 자무쉬의 영화 <천국보다 낯선>(1984)을 촬영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래서 <망각의 삶>은 까맣게 잊고, <천국보다 낯선>을 보던 때를 떠올렸다.


<천국보다 낯선> 하면 생각나는 장면. 이 이미지가 다 했다.

이 영화는 1995년 11월 11일에 개봉했다. 동숭시네마텍의 개관 기념작이기도 했고. (지금은 기억이 가물가물한데) 나는 이 영화를 첫날 1회에 봤던 것 같다. (당시에는 영화를 전공한 것도 아니고, 영화를 공부할 생각도 안 했던 때인데, 무슨 영화를 누리겠다고 그랬는지 모르겠다) 아마도 이런 영화 정도는 봐줘야 남다른 예술 취향을 가진 사람이겠거니, 생각했겠지. 


입장할 때, 오리지널 포스터를 받았고, (동숭시네마텍에서는 꽤 오랫동안 오리지널 포스터를 줬다) 영화 시작 전, 짐 자무쉬의 단편 <커피 앤 시가렛>(이기 팝과 톰 웨이츠가 나왔던)이 상영됐다. 그래, 기억난다. 추운 11월의 아침, 마로니에 공원 근처 어딘가의 지하, 그리고 영화를 함께 봤던 사람이 누구였는가도.


정작 <천국보다 낯선>은 잘 기억나지 않는다. 


반짝반짝 빛나던 포스터와 전혀 다른 이야기였다. (당시 웬만한 카페에는 <천국보다 낯선> 포스터가 걸려 있었다. 그리고 <아리조나 드림>과 <블루>와 <그랑 블루>의 포스터도) 너무나 지루했던 리얼리즘. 어쩌면 내가 너무 어렸기에, 짐 자무쉬의 세계를 이해하지 못했을 수도 있다. 그리하여 함께 갔던 친구와 머리를 주고받으며 졸고 말았다.


지금까지도 <천국보다 낯선>은 기대했던 이미지와 완전 다른 영화로 기억되고 있다. 좀 더 재밌었으면 좋았을 텐데. 이후에도 짐 자무쉬 영화와는 친하기 힘들었다. (<데드 맨>(1995), <고스트 독>(1999) 그리고 <브로큰 플라워>(2005)까지도 쉽진 않았다.)


<패터슨>(2017)은 좋았다. 그가 유해진 건지, 내가 나이를 먹은 건지.


1995년 11월은 이상한 때였다. 


내 인생의 짧은 황금기가 저물고, 어둑어둑한 어른의 세계로 진입할 무렵이었다. 그 끝과 시작이 겹치는 때에, <천국보다 낯선>을 봤다. 영화는 인식의 범위를 넘어섰고, 나는 혼란스러웠다. 영화를 보고 난 이후, 살며시 세상이 변했다. 어쩌면, 내 안온한 생활에 생긴 균열을 그제야 눈치챈 것인지도 모른다.


이후에도 나는 동숭시네마텍에서 <소년, 소녀를 만나다>(레오 까락스, 1984)나 <노스텔지아>(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 1983) 같은 영화를 봤다. (오리지널 포스터는 계속 쌓였다) 언젠가 <붉은 시편>(미클로슈 얀초, 1971)을 볼 때는, 새근새근 자고 말았다. (이 영화는 총 세 번을 봤는데, 세 번 모두 깔끔하게 잤다) 


이렇게 몇 년 간, 고전 영화를 보러 문턱이 닳도록 드나들었다. (<천국보다 낯선>을 보러 갔던 친구와는 그 무렵부터 멀어졌다. 아니 낯설어졌다고 해야 할까.)


오랫동안 동숭시네마텍도 <천국보다 낯선>도 잊고 있었다. 천국보다 낯선. 멋진 포스터에 멋진 영화 제목이다. 그리고 '맞아, 옛날에 그런 일이 있었지'라고 떠올리는 시간을 갖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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