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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솔라리스의 바다 Dec 22. 2022

망각의 삶

영화가 힘들다는 걸, 자꾸만 까먹는다.

<망각의 삶>(톰 디칠로, 1995)은 영화를 만드는 게 얼마나 힘들고, 또 매력적인지 보여준다.


영화는 세 개의 이야기로 구성되어 있다. 첫 번째 에피소드는 감독인 닉(스티브 부세미)의 이야기, 두 번째 에피소드는 니콜(캐서린 키너) 그리고 세 번째 이야기는 뭐라고 설명해야 할까? (스포 없이 이야기하려니, 말하기가 어렵네요.)


*스포 있음


이 영화에서 스티브 부세미는 제대로 되는 게 하나도 없는, 운 나쁜 감독으로 나온다.

첫 번째 에피소드는 닉의 꿈이다. 계속해서 NG가 나는 꿈을 꾸는 닉. 결국 잠에서 깨는데, 촬영 날 새벽 4시다. 밤새 촬영하는 꿈을 꾼 것이다. 그것도 하나도 제대로 되는 게 없는 꿈을. 


잘 나가는 배우 채드는 감독과 여배우를 깡그리 무시한다. 

두 번째 에피소드는 니콜의 꿈이다. 꿈에서 상대 남자배우 때문에 골머리를 앓는다. 결국 몸싸움으로 귀결되고, 그 와중에 닉이 자신을 좋아한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물론 꿈에서의 이야기다) 그러다가 잠에서 깨고 나면, 새벽 4시가 넘은 시간. 지각이다.


세 번째 에피소드는 현실이다. 닉은 닉대로, 니콜은 니콜대로 잠을 못 자서 괴로운 얼굴로 촬영장에서 만난다. 


하지만 역시나 촬영장에서는 별의 별일이 다 생긴다. 왜소증 배우 티토(피터 딘클리지)는 촬영장을 박차고 나간다. 연기를 내뿜는 기계는 고장 나서 효과를 낼 수 없고, 촬영감독은 방금 전 여자친구에게 차인 뒤, 슬픔에 잠겨 있다. 설상가상으로, 요양원에 있는 엄마가 닉을 찾아왔다. (엄마는 살짝 치매 증세가 있다.)


촬영장에서 정말로 울고 싶을 때가 있다.

불행이란 불행이 모두 찾아온 것 같은 촬영장. 닉은 결국 촬영을 포기한다. 그때, 기적 같은 일이 일어나고, (원래 계획했던 스타일은 아니었지만) 간신히 촬여에 성공한다. 90분 정도 되는 영화에서 수십 번이나 촬영을 하는데, 영화의 끄트러미에서 만나는 첫 번째 OK 컷이다. 닉도 감동했고, 스태프도 감동했고, 나도 감동했다. 


이렇게 영화는 세 개의 에피소드로 이루어져 있다. 첫 번째와 두 번째 에피소드는 꿈이지만, 서로 조금씩 연결되어 있기도 하다. 이른바 피카레스크식 구성인데, 나는 이런 스타일을 좋아한다. 같은 세계관을 공유하는 각자의 이야기들. 


<망각의 삶>은 독립영화를 만드는 이야기인데, 영화 자체도 독립영화다. 


감독은 톰 디칠로. 검색을 해봤는데, 짐 자무쉬의 영화 <천국보다 낯선>(1984) 등을 촬영한 촬영감독 출신이었다. 이후 도어즈와 짐 모리슨에 관한 다큐멘터리 <When You're Strange>(2009) 등을 연출했다. 아마도 대상과 상황을 관조적으로 보는데 익숙한 사람이지 싶다. (영화 속에서 픽업 스태프로 나오는 사람이 톰 디칠로와 닮았는데, 크레딧에는 표기가 없어서 잘 모르겠다.)


이 영화에서는 배우들도 인상적이다. 


<콘 에어>에서 스티브 부세미는 연쇄살인마로 나온다. 소문이 무성한 그가 등장할 때마다 오싹해진다. (그런데 귀엽다.)

가장 중요한 인물은 스티브 부세미다. 이 영화는 그가 한참 잘 나갈 때 촬영했다. 당시 그는 <저수지의 개들>(1992)을 찍은 뒤였고, <파고>(코엔 형제, 1996)와 <콘 에어>(사이먼 웨스트, 1997)를 찍기 전이었다. 엄청난 작가영화와 상업영화들 사이에 매력적인 독립영화를 남겼다.  


그리고 캐서린 키너와 피터 딘클리지가 기억난다. 


캐서린 키너는 <겟 아웃>에서 여주인공의 엄마 역을 맡았다. 얄미운 사람이었다.

훗날, 니콜 역을 맡았던 캐서린 키너를 <존 말코비치 되기>(스파이크 존스, 1999), <비긴 어게인>(존 카니, 2013), <겟 아웃>(조던 필, 2017) 같은 영화에서 볼 때마다 혼자 뿌듯해했다. 저 배우의 신인 시절에 촬영한 <망각의 삶>을 나는 봤지, 하면서. 


피터 딘클리지도 마찬가지다. 


필모그래피를 보면, <망각의 삶>이 데뷔작이다. 이후, <나니아 연대기: 캐스피언 왕자>(앤드류 아담슨, 2008)나 <엑스맨: 데이즈 오브 퓨처 패스트>(브라이언 싱어, 2014), <쓰리 빌보드>(마틴 맥도나, 2017) 같은 영화에서 볼 때마다, 잘 살아남았구나, 계속 연기를 하는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피터 딘클리지는 <엑스맨: 데이즈 오브 퓨처 패스트>에서 인상적인 역할을 맡았다.

실은 내가 아주 옛날에 만든 영화에도 왜소증 배우님이 출연했었다. 지금은 연락이 되지 않지만, 피터 딘클리지를 볼 때마다 그 배우님이 생각난다. 어디선가 계속 연기를 하고 있다면, 스크린에서 봤을 텐데, 그러지 못하고 있다. 


그렇다면, 이 영화가 전하는 메시지는 뭘까?


영화는 매력적이니 계속해라, 일까? 아니면, 이토록 힘든 게 영화니까 꿈도 꾸지 말라, 일까? 

나는 '망각'에 대해 말하고 싶다. 영화는 힘들다. 웬만하면 다 힘들다. 시나리오를 쓰는 것부터, 촬영 준비와 촬영, 후반 작업 그리고 상영까지. 수월하게 되는 게 단 한 개도 없다. 그래서 시나리오 쓰면서 후회하고 준비하면서 후회하고 촬영하면서 편집하면서 후회한다. 스크린에서 영화를 볼 때도 후회한다. (저거, 편집을 바꿨어야 했는데... 이런다.)


하지만 그렇게 극장에서 나오자 마자, 다음 영화를 생각한다. 


이런 이야기를 써서, 누구를 출연시키고, 촬영은 누구에게 맡기고, 어디에서 촬영해야지, 하는 것들을. 바보처럼 금방 까먹고, 다시 영화를 만든다. 그런 감정을, 영화는 너무나 잘 표현하고 있다. 그래서 바로 직전까지 영화를 그만두겠다고 난리 치던 인간들이, 한 컷을 무사히 마무리한 뒤, 곧바로 다음 촬영 준비를 하는 걸 보면서, 맞아, 우리도 그래. 늘 저런 식이지, 하고는 깔깔거리게 된다. 


여전히 영화를 만들고 싶다. 다음 작품은 늘 기약할 수 없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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