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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솔라리스의 바다 Jan 20. 2023

더 퍼스트 슬램덩크

지하철에서 눈물짓던 친구의 이야기

'슬램덩크'의 극장판 <더 퍼스트 슬램덩크>(이노우에 다케히코, 2022)를 보다. 


이 극장판 애니메이션은 특이하게도 송태섭의 이야기를 기반으로 하고 있다.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산왕전 경기를 토대로 하면서, 송태섭의 과거와 현재를 플래시 백을 통해 집어넣었다. 처음 보는 사람이라면 약간 어리둥절할 수도 있지만, '슬램덩크'의 팬이라면 확장판을 보는 기분일 것이다. (진정한 스핀 오프라고 할 수도 있겠다.)


(*스포 조금)


그리하여 송태섭이 어떻게 농구를 시작하게 되었는지, 형과의 관계는 어떤지, 그리고 엄마와의 애증까지 세밀하게 보여준다. 익히 알다시피 만화 '슬램덩크'는 강백호의 이야기다. 강백호를 중심으로 정대만이나 채치수의 이야기가 켜켜이 쌓여 있다. 그리고 다른 학교 농구부 친구의 이야기도 종종 나온다. 예를 들면, 윤대협이 있다. (나는 윤대협 캐릭터를 제일 좋아했다.)


하지만 송태섭은 의외였다. (기억을 더듬자면) 매니저인 한나선배를 좋아했던 것 같은데. 현란한 드리블러에 건방지고 비딱한 친구라고만 생각했다. (김승현 선수가 오버랩되곤 했다) 왜냐하면 '슬램덩크' 만화판에서는 송태섭에 대한 이야기가 거의 나오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번 <더 퍼스트 슬램덩크>에서 송태섭의 과거로부터 시작되는 게 좋았다. 너무 좋았다. 영화 속에서만 주인공과 조연, 단역이 있을 뿐, 우리 인생에서는 각자가 모두 주인공이기 때문이다. 


그러면서도 <더 퍼스트 슬램덩크>에서는 모두가 알고 있는 명장면과 명대사가 나온다. "포기하는 순간, 경기는 끝난다"라든지 "감독님의 전성기(영화에서는 '영광의 시대'라고 나오지만)는 언제인가요? 저는 지금입니다" 같은 대사. 그리고 모두가 사랑하는 "왼손은 거들뿐" 같은 대사가 나온다. 서태웅과 강백호가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하이 파이브를 하는 장면도. 


영화를 보는 내내 옛날에 처음 '슬램덩크'를 읽던 때가 생각났다. 


나는 '슬램덩크'에 관심이 없었다. 하지만 또래 친구들은 무척 좋아했다. 그러던 어느 날, (아마 여름이었던 것 같다) 강남 어딘가에서 친구를 만났다. 그날은 슬램덩크 마지막 권이 나온 날이었다. 그래서 교보문고인지 어딘지에서 슬램덩크를 사서 친구에게 선물했다. 그리고 함께 지하철을 타고, 어디론가 가는데... 비닐을 뜯고 슬램덩크 마지막 권을 보던 친구가 울면서 웃고 있었다. 그 광경이 너무 황당해서, 계속 놀려댔다. 친구는 울고 나는 놀리고 지하철은 달렸다. 


그리고 몇 년이 지났다. 


나도 슬램덩크를 보게 되었다. 사실, 슬램덩크의 기본 구조는 무협지와 같다. 이른바 영웅 서사구조다. 다만 슬램덩크의 강백호는 무협지의 영웅과 달리, 소소하고 코믹할 뿐이다. 가장 비슷한 건, 서사의 진행과정뿐만 아니라, 회상으로 빠지는 구조다. <영웅문>(김용) 같은 책을 보면, 상대방이 어떤 자세를 취하는 순간, "아니, 저건..." 하면서 수십 년 전 과거로 돌아가서 저 자세가 어떻게 시작되었고 등등의 이야기를 한 없이 설명한 뒤 다시 현재로 돌아오는데, 여기에 수십 페이지의 분량을 쓴다. 슬램덩크도 마찬가지다. 그러다 보니, 한 경기를 진행하는데 몇 권의 만화책이 소요되는 것이다. (<더 퍼스트 슬램덩크>도 그런 방식으로 진행되었다. 극 중에서 40분짜리 경기를 하는데, 영화의 러닝타임은 2시간이나 된다.)


이게 중요한 게 아니고.


어쩌다 보니 슬램덩크 만화책의 마지막 권을 지하철을 타고 가다가 보게 되었다. 그리고 "왼손은 거들뿐"에서 울고 있는 나를 발견했다. (지하철 유리창에 비쳤다) 그리고 강백호와 서태웅이 하이 파이브를 한 뒤, 서로 등지는 장면에서 웃고 말았다. (사람들이 쳐다봤다) 그때, 오래전 일이 생각났다. 아, 그때 그 친구가 울고 웃었던 장면이 여기였구나. 


오늘은 가족과 <더 퍼스트 슬램덩크>를 봤다. 영화 중간중간에 계속 설명을 해줬는데, 마음 한 편에서는 뿌듯한 기분도 들었다. 아주 오래전에 봤던 만화였다. 그리고 지금은 다른 사랑하는 이들에게 부가적인 내용을 설명한다. 나는 슬램덩크가 좋았다. (다른 이들도 많이 좋아할 것이다) 특히 좋았던 건, 산왕과의 경기를 이기고는 다음 경기에서 패배하기 때문이다.


지난 도쿄올림픽에서 여자배구팀이 일본을 물리친 뒤 찍은 사진을 보면서, 슬램덩크에서 북산이 산왕을 꺾고 찍은 사진이 생각났다.
북산고는 산왕을 꺾은 뒤, 그다음 경기에서 패배한다. 산왕전에 모든 걸 쏟아부었기 때문이다.

만약, 북산고가 우승을 했다면, 더 앞으로 나가지 못했을 것이다. 기적처럼 꿈의 승리를 하고, 패배를 만난다. 극 중에서 산왕의 정우성이 빌었던 소원처럼. (그는 고등학교 생활 동안 늘 승리와 우승을 했기 때문에, 이번 경기에서는 특별한 경험을 하게 해달라고 빌었다. 그리고 첫 패배를 한다. 에필로그를 보면 정우성이 미국에서 선수 생활을 하는데, 아마도 북산전에서의 패배가 좋은 경험이 되었을 것이다.)


나는 늘 패배하며 살고 있다. 하지만 패배하니까 또 다음 경기를 준비할 수 있다고 믿는다. (아주 오래전에 생각했던 거라, 이제는 조금 낡지 않았나 싶기도 하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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