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운 겨울의 하나비

친구와 함께 마지막으로 본 불꽃, 아니 영화

by 솔라리스의 바다

중학교 때부터 친구였던 녀석. 그와 함께 수많은 영화를 봤다.


그리고 친구와 마지막으로 본 영화는 <하나비>(기타노 다케시, 1997)다.


13110210A8395BF0B4 젋은 시절의 기타노 다케시에게는 무서운 인상과 쓸쓸한 표정이 공존한다.

영화를 볼 당시 나는 군인이었다. 우리 부대의 대대장님은 최신 기기를 탐닉하는 분이었고, 어느 날 외박을 나가는 나에게 노트북을 사 오라는 명령을 내렸다. 아니다. 정확하게는 노트북 구입을 위해 외박을 보내준 것이다. 내 입장에서야 외박 명령이 고맙기는 했지만, 하늘과 같은 상관의 노트북을 사서 무사히 돌아간다는 게 여간 부담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어떤 제품이 좋은 건지, 가격은 알맞은 건지도 몰랐으니까. 그래서 친구에게 연락을 했다. 당시 친구는 컴퓨터 조립이나 고장 수리 같은 알바를 하고 있었다. 내 기억에는 분명히 법학과를 간 것 같은데, 법전보다는 컴퓨터 책을 보는데 열중하고 있었나 보다. (좀 안 어울리긴 했다.)


그래서 오랜만에 다시 만났다. (대학 시절 내내 통 만나지 못했다) 우리는 지하철을 타고 강변역 테크노마트에 갔다. 거기에는 친구가 자주 왕래하는 가게가 있었고 최선의 거래를 할 수 있었다. 그리고 노트북을 목숨보다 소중하게 끌어안은 채 영화를 보러 갔다. 고마운 친구에게 해줄 수 있는 나의 최선이었다. 당시는 일본문화가 처음 개방되었을 때로, 영화의 경우에는 국제영화제에서 수상한 작품만 상영할 수 있었다. 베니스영화제에서 상을 받은 <하나비>는 그렇게 개봉할 수 있었다고 한다. 그리고 우리가 간 강변 CGV는 우리나라에 생긴 최초의 멀티플렉스라고 했다. 물론 종로 3가에 있는 서울 극장 같은 경우는 80년대부터 여러 개 스크린이 있긴 했지만, 이렇게 복합상영관의 개념으로 생긴 극장은 처음이라고, 친구가 말해주었다.


오랜만에 만난 친구의 변한 모습(장발이었다!), 노트북이라는 처음 보는 물건, 그리고 군인이 된 내 모습보다도 낯설었던 건 극장이었던 것 같다. 세련된 복도, 깔끔한 매점, 근사한 화면과 안락한 의자. 그곳에는 더 이상 화장실 냄새가 나지 않았고, 엔딩 크레디트가 끝나기도 전에 문이 열리지도 않았다. 반면에 사운드 음질은 훌륭했으며, 화면도 정말 선명했다.


그래도 뭔가 이상했다.


극장이 아니라 병원 소독실에 앉아있는 기분이랄까? 허리우드 극장이나 피카디리 극장, 하다못해 동시상영관에는 있지만 멀티플렉스에서는 철저하게 제거된 것. 그것은 바로 엉성함과 포근함이었다. 옛날 극장은 지저분함과 불편함까지도 온몸으로 끌어안고 파리를 날리면서도 나를 기다려주는 장소였다. 명절이 되면 친구들과 떠들썩하게 영화를 보기도 했지만, 언젠가는 여자 친구와 헤어진 뒤 눈물을 감추기 위해 극장으로 숨기도 했다. 그렇게 옛날 극장은 넓은 어깨로 포근하게 나를 안아주었다. 마치 친구처럼 말이다. 하지만 멀티플렉스는 새로 부임한 대대장님 같았다. 정중하지만 깐깐했고 괜스레 어색했다. 하지만 시대는 변했고, 단관극장은 차례차례 사라졌다. 이제는 영화를 위해 복합쇼핑몰에 가야 한다.


그렇게 단관극장이 사라질 무렵 친구와도 멀어지게 되었다. 희한한 일이다. 그 낯선 극장에서 함께 영화를 본 뒤, 다시는 친구와 만나지 못했다. 특별히 싸운 일도 없었다. 가끔은 전화로 안부를 묻기도 했지만, 거기까지였다. 친구는 내 생활에서 걸어 나갔다. 마치 영화가 끝난 것처럼. 물론 나 또한 친구의 인생에서 사라졌겠지. 어쩌다 내 생각을 할지도 모른다. 나도 <다이하드>의 새로운 시리즈가 개봉할 때마다 친구를 떠올리곤 하니까.


어디선가 우연히 만날 수 있을 거라 생각했는데, 한 번도 보지 못했다. 아마도 나와 겹치지 않는 영역에서 살고 있나 보다.


나는 여전히 옛날 극장을 그리워한다. 지금도 그때 일들이 또렷하게 기억난다. 영화보다도 영화관에서 있었던 일이 자주 생각난다. 구석의 먼지 한 톨까지도 굉장히 그립다. 친구도 그립다. 한 시절 재미나게 어울려 다녔다. 외톨이였던 나에게 기꺼이 손을 건네주었다. 나는 친구를 통해 비로소 학창 시절을 열 수 있었다. 이렇게 옛날 일이나 생각하고 있다니, 이게 다 나이를 먹는다는 얘기인가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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