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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솔라리스의 바다 Jun 21. 2023

인간의 조건

안드로이드가 저장한 영상물은 녹화물일까, 기억일까?


내가 생각하기에 <애프터 양>(코고나다. 2021)의 주제는 안드로이드의 저장장치에 담긴 녹화영상을 기억으로 인정할 수 있는가, 하는 것이다. 이를 기억으로 간주한다면, 안드로이드는 하나의 인격체이자 생명체, 새로운 종으로서의 인간이 되는 셈이다.


내용은 이렇다. (스포 있음)


빨간 옷을 입은 청년이 양이다. 부모는 입양한 딸을 위해서 동양계 안드로이드를 구입했다.

어느 날, 가족처럼 지냈던 안드로이드 '양'이 작동을 멈추자, 제이크는 양을 고치기 위해 이곳저곳을 수소문하게 된다. 그런 과정에서 양의 몸속에 불법 저장장치가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당시에는 인간의 사생활 보호 차원에서 안드로이드는 일절 녹화/저장을 못하게 되어 있었다. 하지만 오래전에 만들어진 양은 이 기능이 작동하고 있었다. 양이 신제품이 아니라 리폼 제품이었기 때문에 그런 기능이 남아 있던 것이다.)


제이크는 처음에는 호기심에서 양의 저장장치를 들여다본다. 가족들과 함께 살았던, 그리고 친밀하게 지냈던 양의 입장에서 가족은 어떤 모습으로 남아 있을까? 아마 그런 궁금증이 있었을 것 같다. 이렇게 양의 기록물을 들여다보던 제이크는 영상물 속에 계속해서 등장하는 어떤 여인을 발견한다. 그리고 그 여인에 대한 호기심이 생긴다. 


앞서 말했듯이 이 영화의 핵심은 기계(안드로이드)가 촬영한 동영상을 기록으로 볼 것이냐, 기억으로 볼 것이냐에 있다. 하지만 나는 제이크가 조심스레 양의 저장장치를 확인하고 어떤 내용이 있을지 궁금해하는 것에서 이미 양을 하나의 주체로 보고 있다고 생각한다. 여기에는 양이 가지고 있는 영상물이 양의 '선택'에 의해서 기록하고 보관한다는 전제가 있기 때문이다. 선택은 주체적인 감상이다. 그러므로 양이 뭘 남겼을까,라는 궁금증은 양이 감정을 가지고 장면을 선택했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CCTV나 블랙박스 같은 기록장치에게는 이런 궁금증을 갖지 않는다.)

 

기억은 오랫동안 인간의 정체성을 판단하는 근거가 되었다. (특히, SF 영화에서 이런 설정이 자주 나온다) 이 영화에서도 안드로이드 양은 기억에 준하는 기록물을 남겼기 때문에 매우 인간적이다, 혹은 주체적인 생명체다,라는 결론이 가능하다. 하지만 이 기억이라는 개념조차도 너무 인간 중심적이다. 아니 인간/비인간을 나누는 것조차 너무나 인간적인 편견이다. 양은 인간일까? 인간에 준하는 생명체일까? 우리 인간 입장에서는 '우와, 완전 인간 같은 안드로이드야.'라고 말하겠지만, 양의 세계에서 양은 그냥 양일뿐이다. (오히려 그렇게 편을 가르는 인간을 이상하게 볼 것이다.)


<블레이드 러너>(리들리 스콧, 1982)에서는 기억이 인간의 정체성을 판단하는 요소가 된다.

그런데 만약 기억이 인간의 정체성을 판단하는 근거라면, 기억상실증 환자는? 알츠하이머병을 앓고 있는 환자분들은 인간이 아닌 것일까? 우리 주변에 건망증이 심한 사람은 인간의 정체성이 희미해지는 중일까? 그렇다면 10분마다 기억이 리셋되는 <메멘토>(크리스토퍼 놀란, 2000)의 레너드는? 


기억은 소중하지만, 불확실하고, 이기적이다. 인간의 정체성과도 상관없는 것 같다. 불과 얼마 전에 자신이 한 말도 기억하지 못하고 딴소리를 하는 사람들을 보면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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