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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솔라리스의 바다 Jul 30. 2023

캐빈에 대하여

자식의 잘못이 자꾸만 내 책임인 것 같은 기분

<캐빈에 대하여>(린 램지, 2011)에서 캐빈의 엄마인 에바가 계속 고민하는 건, 아마도 죄책감 아닌 죄책감 때문일 것이다. 내가 좀 더 좋은 마음을 가졌더라면, 상냥하게 대했다면, 그때 화를 내지 않았더라면, (영화 속에서는 나오지 않지만) 아이가 뱃속에 있을 때 태교를 잘했더라면, 아니 처음부터 선하게 살았더라면, 어쩌면 캐빈은 달라지지 않았을까? 


아이가 삐뚤어졌다거나 사고를 쳤거나, 아니 일반적이라고 말하는 궤도에서 조금만 벗어나도 부모들은 고민한다. 내가 밥을 잘 차려주지 않아서, 용돈을 조금만 줘서, 집이 풍족하지 않아서 등등. <캐빈에 대하여> 속 엄마의 심정을 누구도 대변해주지 못하겠지만, 나는 이 영화를 보면서 에바가 계속 망설이고 있다고 생각했다. 캐빈의 행각을 보면, (남들이라면) 철저하게 욕해줘도 되는 아이지만, 에바는 타자화할 수 없다. 엄마니까. 


그리고 어디까지 잘못을 하면 아들과의 관계를 끊을 수 있을까? 그 한계점에 대해서도 질문한다. (스포 있음) 캐빈은 심지어 아빠와 여동생까지 죽인다. 이 정도면, 아들이라고 해도 절연할 수 있지 않을까? 아닌가? 그래도 희망을 갖고 노력하면 달라질까? 하지만 달라질 거라는 기대를 갖고 계속 관계를 이어오다가 결국 살인마가 된 건 아닌가? 적당한 때에 오히려 캐빈을 잘라내는 게 맞지 않았을까? 그런데 과연 혈육에게, 더구나 내가 낳은 자식을 그렇게 끊을 수 있을까?


영원한 딜레마다. <캐빈에 대하여>의 에바는 아마도 영원히 고통 속에서 살 것이다. 캐빈 때문에 희생당한 사람들에게 미안하고, 캐빈에게도 미안할 것이다. 혹시라도 자신이 그런 빌미를 제공한 건 아닌지, 끊임없이 자문하게 만든다. 


영화를 보면서, 계속해서 비교하게 된다. 나는, 나의 아이들은 어떤지. 하지만 내가 에바보다 낫다고 할 수 있나? 혹은 에바보다 못했다고 할 수 있나? 아이들은 (현재) 캐빈보다 나쁘진 않지만, 앞으로도 그럴 수 있다고 단정할 수 있을까? 세상에 어느 부모가 자식을 놓고 큰소리칠 수 있을까? 아무도 자신 있게 말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래서 어른들은 어디 가서 자식자랑을 하지 말라고 했나 보다) 어머니들이 뒤늦게 종교에 귀의하는 건, 자식 때문일 가능성이 크다. 그들에게 해줄 수 있는 건, 기도 밖에 없으니까.


그래도 <마미>(자비에 돌란, 2014), <러덜리스>(윌리엄 H. 머시, 2014) 그리고 <캐빈에 대해여>를 보면서 아이를 둔 부모는 모두 똑같은 감정을 느꼈을 것이라는, 일종의 연대감을 느끼긴 했다. 그건 영화에게 고맙게 생각한다. 이것을 느끼자고 고통스러운 내러티브를 거쳐야 한다는 게 문제긴 하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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