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멸하는 장소
“OOOO 살았댔지? 거기 재건축 들어간대.” 과천에 사는 선배가 소식을 전해줬다. 올 것이 왔다. 지금 집에 오기 직전에 살았던 집도 이제 소멸 선고를 받았다.
지금까지 내가 살았던 집은 11곳이다. 이 가운데 7곳은 이미 흔적 없이 사라졌다. 나머지 두 곳은 재건축하기 위한 절차가 시작됐고, 철거 계획이 없는 집은 두 곳뿐이다. 무탈한 곳은 사회생활을 막 시작해서 살았던 원룸과 오피스텔이다.
멸실됐거나 그렇게 될 집은 부모님과 함께 살던 연립주택이나 아파트, 주상복합이다. 한 아파트는 재건축으로 3천 세대에 가까운 대단지 아파트로 바뀌었다. 갓난아이 때 살던 집은 주상복합이 되었는데, 준공연도가 최근인 걸로 봐선 이미 한 차례 정비됐다가 허물고 또다시 지은 것으로 짐작된다. 어느 집은 상가 건물로 바뀌어 더 이상 주택이 아니다. 대학 때 독립해 살았던 다가구 주택은 재개발을 거쳐 뉴타운이 되었다.
사라진 집들이 이 땅에 머무른 시간은 인간의 수명에 비하면 그리 길지 않다. 생애 첫 기억이 남아 있는 안양의 저층 아파트는 준공된 지 25년 차가 되기 전에 허물어졌다. 그나마 오래 버틴 안양의 또 다른 아파트는 39년 간 서 있었는데, 조합 내홍으로 재건축이 지연됐기 때문이다.
마흔 살 넘어 돌아보는 옛집들이 안녕하지 못한 건, 한국에선 특별한 경험은 아니다. 법정 재건축 연한은 건설 기술과 도시 정비의 필요성 등에 따라 준공 후 20년에서 40년, 또 30년으로 바뀌어왔다. 그 결과 이 땅의 멸실 주택의 평균 수명은 약 30년에 불과하다.* 하지만 미국 주택의 평균 수명은 55년, 영국은 77년이라고 하니, 한국의 집은 다른 나라에 비해 절반쯤 살고 단명하는 셈이다.
곧 철거된다는 소식을 듣고 옛집을 일부러 찾아가 본 적이 있다. 그때로서는 내 생애 가장 오랜 기간인 8년 간 살았던 아파트였다. 마지막 모습을 남기기 위해 오랜만에 DSLR을 꺼내 챙겼다. 떠난 지 24년 만의 방문인데도, 어제 왔던 것처럼 모든 게 익숙했다. 중학교를 졸업하며 그곳을 떠났으니, 내가 거기에 주차를 하는 건 처음이었지만 차를 어디에 대야 할지 조금의 망설임도 없었다.
내 발은 알아서 움직였다. 경비실이 딸린 아파트 현관을 지나 엘리베이터를 타니 귀에 익은 알림음이 오래전 기억을 깨웠다. 엘리베이터실과 멀지 않은 복도 쪽에 난 창문 하나가 내겐 첫 개인 공간이었다. 녹슨 하늘색 문에는 예전에 없던 전자식 자물쇠가 추가로 달려 있었다. 옛집엔 공가를 알리는 스티커가 아직 붙지 않았지만, 인기척도 느껴지지 않았다.
한참을 그 복도에 서 있었다. 9살 때 틈 사이에 한쪽 발을 끼우고 까치발을 해야 겨우 턱끝이 닿았던 난간은 이제 가슴께에 걸렸다. 어쩌다 열쇠를 깜빡한 날이면 나는 그 난간에 매달려 주차장을 내려다보며 어머니를 하염없이 기다렸다. 가끔은 들어와서 기다리라며 옆집 문이 열리기도 했지만, 나는 복도 끝에서 저층 단지에 내려앉는 노을을 보는 걸 좋아했다. 그 시절처럼 경비 아저씨가 주차장에서 여전히 낙엽을 쓰는 소리가 들려왔다.
5층에선 엘리베이터보다 빠르게 뛰어 내려갈 수 있었다. 다른 가족들이 엘리베이터를 타도 나는 혼자 계단을 우다다 내려가다가 결국 굴러서 무릎이 깨진 적이 있다. 녹슬지 않도록 반짝반짝 윤이 나게 닦아 놓은 철재 계단 마감재는 차갑고 날카로웠다. 그때 생긴 상처는 지금도 남아있다.
흘러간 시간 동안 아파트 단지의 가로수들은 그윽해져 있었다. 동마다 노란 은행잎을 가득 쓸어 담은 낙엽 포대가 부잣집 금고처럼 쌓였다. 나는 동과 동을 잇는 비밀스러운 오솔길을 따라 놀이터와 낡은 상가를 돌아다녔다. 그렇게 한참을 들락거리다 허기가 올라와 슈퍼에서 초코 바 하나와 우유를 샀다. 초코 바를 한 입 베어무는데, 불현듯 이 간식도 여기 살던 시절에 들인 버릇이라는 걸 깨달았다. 나는 별로 변한 게 없고, 온몸의 감각으로 그곳을 기억하는데, 그 시절의 저장소였던 그 공간은 해체되고 있었다. 저녁 어스름이 내린 겨울날, 서늘한 공기가 퍼뜩 시리게 느껴졌다. 나는 감정이 북받쳐올라 달아나듯 그 자리를 떠났다.
그날 옛집을 영원히 보내는 나의 작별 의식은 몇십 장의 사진으로 남았다. 롤랑 바르트는 사진이 불러일으키는 감정을 스투디움과 푼크툼으로 구분했다.** 스투디움은 사진에서 일반적으로 파악하는 객관적인 정보나 지식이다. 예를 들어 가족사진을 보면, 누구나 닮은 얼굴의 인물들을 발견하고 옷차림과 배경으로 이들의 관계나 생활양식 등을 짐작할 수 있다. 반면 푼크툼은 보는 이의 무의식에 가라앉아 있던 기억을 찌르는, 개인적이고 날카로운 감정이다. 촬영자가 의도하지 않아도, 사진의 어느 디테일은 보는 이에게 강렬한 정서 반응을 일으킬 수 있다. 때로는 사진에 직접 드러나지 않아도 카메라 너머 촬영자와 피사체가 맺은 관계가 건드려지면 모종의 감정이 솟구치기도 한다.
낡은 복도식 판상형 아파트 단지를 마주하면 나는 그 이중의 감정을 느낀다. 사람들은 그곳에서 노후한 공동주택을 볼 것이다. 누구는 그곳에서 주차난이나 낡은 설비 같은 골치 아픈 불편함을 떠올릴 것이고, 누군가는 건폐율과 용적률, 현재 시세와 미래 가치를 계산해 투자 기회를 찾을 것이다. 혹은 누군가는 한국에서 특정 시기 대량 생산된 공동주택의 특성과 중산층의 주거 양식을 읽어내기도 한다.
이에 더해 나는 재건축을 앞둔 아파트 단지를 보면 애틋한 마음이 든다. 흔해 빠진 낡은 콘크리트 더미에 감정을 품는 게 이성적으로는 이상하다고 생각하면서도, 멸실을 당연하게 넘기지 못하고 마음 한편에 상실감이 자리 잡는다. 이후에 더 넓고, 더 편리하고, 더 비싼 집에서도 살아보았지만 그만큼 정이 들지는 않았다. 그곳은 지금의 나를 만든 시간이 쌓였던 공간, 아련하고 쓸쓸한 감정의 고향, 이제는 소멸해 버린 우주다. 내 기억 속에는 남아 있지만 현실에선 더 이상 존재했던 흔적을 찾을 수 없다. 나는 아파트 키즈다.
*박용석. 「주택 리모델링 시장의 현황과 정책과제」. 한국건설산업연구원, 2024년 6월.
**롤랑 바르트. 『밝은 방』. 김웅권 옮김. 동문선, 2006.
이 글은 도시관측 챌린지 활동으로 작성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