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50cc가 알려준 안정감
3월이 지나고 슬슬 추위가 풀려가던 때에 서울 동부권 바이크 단톡방에서 한 번은 내가 먼저 바리를 가자고 벙(번개)을 올린 적이 있었다. 그 단톡방에는 여전히 얼굴 한 번도 보지 못한 구성원이 과반이었기에, 그 같은 시도는 일종의 복불복의 성격을 가지고 있는 일이었다. 비록 내가 제안한 루트 대로 한 바퀴 타고 온다는 점은 변하지 않겠지만 그 과정이 어떤 대화와 주행으로 채워질지는 아무도 모른다는 점이 재미라면 재미고, 리스크라면 리스크였다.
벙을 올리고서 하루 이틀쯤 뒤에 한 분이 참석 표시를 했는데, 이후로는 참석 표시를 하는 사람이 없었다. 처음 뵙는 분과 단둘이 라이딩을 가야 하는 상황이 된 것이었다. 동국(가명)님은 당시 S1000RR과 CBR650F를 소유한 분이었다. 어쨌든 선망하는 리터급 R차(레플리카 스포츠 바이크)를 타는 분이라고 하니 궁금하기도 하고 혼자서 타는 것에 약간 싫증이 난 상태여서 모험을 감행해 보기로 하였다.
집결지에 도착해서 조금 기다리자 그는 풍채 좋은 모습으로 붉은색의 CBR650F와 함께 등장했다. 헝클어진 머리칼을 비니모자로 덮고서, 저음의 목소리로 간결한 인사를 건네었다. 그는 나보다 5살 연상으로 푸근한 인상에 덤덤한 말투의 소유자였다. 듣자 하니 지난겨울 뇌출혈로 쓰러진 후 몇 달간 병원 신세를 지다가 오래간만에 오토바이를 타러 나온 거라 하였다. 느낌상 무난한 라이딩이 될 것 같았다. 곧 예정대로 양평의 어느 라이더 카페로 출발하게 되었다.
처음 만난 라이더끼리 주고받는 이야기(주로 경력 관련)를 소소하게 하다가, 동국님이 문득 솔깃한 제안을 했다. 자기 바이크를 타보지 않겠냐는 것이었다. 4기통 미들급(650cc) 바이크를 선뜻 태워 주시겠다니. 발만 닿으면 타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그즈음 출력에 대한 목마름이 있었고 기회가 된다면 여러 바이크를 시승해보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다.
생각보다 시트고가 높지 않아서 설레는 마음으로 CBR650F를 타고 조심스레 출발했다. 육중한 무게감으로 살살 나가는데 1단에서의 느낌이 내 바이크 와는 비교가 되지 않았다. 당기는 데로 힘 있게 밀고 나가주었다. 그래 이 정도는 돼야지, 라는 생각을 했던 것 같다. 놀랐던 점은 2단, 3단, 특히 4단 정도 올렸을 때는 같은 속도를 내 바이크로 달릴 때보다 훨씬 더 안정적으로 느껴졌다. 차체가 무겁다 보니 흔들림도 덜했고, 토크가 받쳐주니 바닥을 미끄러져 가는 게 아닌 강하게 짚어가는 느낌이었다. 막연히 고배기 바이크는 빠르기 때문에 더 위험하지 않을까 생각했으나 적정 속도를 준수한다면 오히려 저배기 바이크에 비해 더 안전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마디로 신세계였다…! 고출력 바이크를 경험하자 나는 흥분했고 이 느낌이 내가 막연하게 기대했던 대형 바이크 느낌이구나, 하며 감탄했다. 뭐랄까 그건 근사한 느낌이었다. 비유하자면 당나귀가 아니라 근사한 말- 엄청난 힘과 컨트롤, 안정적인 피지컬, 신중하며 온화한 성품을 갖춘-을 타고 도로를 누비는 기분이었다.
그렇게 라이더 카페까지 쭉 뻗은 길을 시원하게 주행하고 카페에 도착했다. 신기하게도 동국님은 처음 만났지만 긴장감이 들지 않았고 굳이 나를 꾸며내지 않아도 괜찮을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말투는 간결하고 소탈했으며 특별히 상대를 '간 보는' 느낌이 들지 않았다. 그냥 바이크 타는 것을 정말 좋아하는 사람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복귀길에는 철판 닭갈비를 먹고 무사귀환 했다. 이후 동국님이 자기 지인들끼리 소소하게 타는 모임이 있다고 그 단톡방으로 들어오라고 하였다. 조금 고민했는데 동국님이 기본적으로 과묵한 성격이기에 비슷한 성격의 점잖은 사람들이 모일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해서 들어가기로 했다. 솔직히 CBR650F를 또 빌려 탈 수도 있을 것이라는 사심(?)도 한 몫했다고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