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에서의 두 번째 임신과 출산
시간을 잠시 거슬러, 초 겨울바람이 코끝을 빨갛게 건드리기 시작하던 지난 12월로 되돌아가 본다. 알람 소리도 없이 눈을 뜬 시각은 4시 35분. 인기척 없는 고요함 속에 내 안의 누군가가 말을 걸어온다.
"오늘인 것 같아"
본능적으로 알아챈 그 목소리를 부표 삼아 오늘 하루의 동선을 마음속으로 헤아려 본다.
오전 내내 불규칙한 진통이 밀려오고 쓸려가는 동안 이불속에서 끙끙 거리며 정신을 모았다. 점심으로 시어머니와 함께 따뜻한 소바를 한 그릇을 먹고 나니 기다리던 10분 이내의 진통 주기가 찾아왔다.
오후 3시. 내진을 받고 나니 자궁문이 열려 있어 입원을 하기로 결정.
오후 4시. 나 홀로 진통실에. 코로나로 가족들의 면회가 모두 제한되어 있는 상황. 온전히 아이와 나, 두 사람의 힘으로 통과해야 하는 시간.
오후 5시. 불규칙한 진통 때문에 시간이 걸릴 것 같다는 조산원 분의 말에 묘한 불이 붙어 필사적으로 제자리걸음과 스쿼트를 병행. 그 덕인지 진통이 점점 가빨라졌다.
오후 6시. 드디어 분만실로 이동. 첫 아이 때와는 달리 아이가 점점 골반 밑으로 내려오는 것이 느껴진다. 무통 주사 같은 건 눈 씻고 찾아볼 수 없는 일본 종합 병원의 시스템을 야속했지만, 아이의 움직임을 온전히 온몸으로 느끼며 힘을 주어야겠다고 생각.
오후 6시 30분. 힘을 줄 수가 없어. 힘 주기가 무서워... 겁을 내고 있는 나를 의사와 간호사 조산원까지 4명이 매달려 사지를 잡고 말했다. 해야 한다고 할 수 있다고. 엄마가 낳지 않으면 아이는 나올 수가 없다고. 당연한 말인데 그 말이 왜 그리도 야속하고 아득하게 느껴지던지.
그렇게 20분을 더 씨름 한 끝에 18:50 열 달 열흘을 품고 있던 보석 같은 나의 아이가 세상의 빛을 보게 되었다. 아니, 세상을 빛내려고 와 주었다.
첫 아이를 낳고 그 고통을 잊을만할 때가 되면 둘째 생각이 든다던데 나에겐 그 마음먹기까지 6년의 시간이 필요했다. 그렇게 겁도 많으면서 어떻게 또 자연분만을 하게 되었냐고 물으신다면 주저 없이 '선택의 여지가 없어서'라고 답하겠다. 한국의 사정에 밝지는 않지만 '무통 천국'이라는 말은 심심찮게 들어봤을 정도로 무통 주사가 보편화되어있다고 했다. 그걸 미련하게, 굳이, 아플 거 다 아파가면서 하려는 사람들은 소위 '자연주의 분만'이라는 것을 (돈을 더 주고) 택한다고. 일본에 있는 나에겐 그 모든 게 그야말로 먼 나라 이야기 같았고, 산모와 아이에게 리스크가 높지 않으면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자연 분만으로 가는 길로 직진해야 했다.
아프다 못해 황홀하기까지 했던 분만의 고통이 지나가고 아이를 품 안에 꼭 안아보는 캥거루 케어. 본능적으로 엄마 젖을 찾는 아이에게 아직 나올 리 없는 초유를 물려주었다. 무리한 힘 주기로 만신창이가 된 하반신이 고통을 호소하는데도 아이를 바라보는 눈과 손은 다른 자아인 냥 평온했다.
그렇게 첫 날밤을 뜬 눈으로 밤을 새우고 맞이한 다음 날 아침.
전쟁이 시작되었다.
첫 아이를 완모(완전 모유 수유)했다는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던 나는 모유수유에 폭발적인 자신감을 가지고 수유실로 향했으나 반나절 만에 좌절 모드가 되었다. 축 쳐진 탄력 없는 가슴을 주물러 가며 뚫어지게 바라보고 있는 것도 고역인 데다 열심히 입질을 하다 제 풀에 지쳐 빠는 것을 포기해버린 아이에게 미안한 마음을 떨칠 수가 없었다. 결국 분유 보충을 하고 타협점을 찾아가야 하나... 아니야 그래도 해야지 사이를 시계추 오가듯 하루에도 수십 번씩 고민하다 터덜터덜 수유실을 나오는 내 모습이 내가 봐도 참 안돼 보였다.
내가 찾은 산부인과는 '모자동실'을 기본으로 하는 곳이라 아이를 낳은 첫 날을 제외하고 입원 중인 6일 동안 내내 아이와 함께 있어야 했다. 갓 태어난 아이와 함께 하며 새삼 깨달은 것은 '신생아의 울음은 정직하다'는 것. 밥 아니면 똥. 괜히 우는 일은 없다. 속을 알 수 없는 사춘기 여고생 보다야 알기 쉬워 좋지만, 2~3시간에 한 번씩 불러대니 잠이 눈 밑으로 떨어져도 일어나야 한다. 출산 첫날 온몸이 흥분을 해서 한 숨도 못 잔 탓에 입원 기간 내내 잠 부족이 이어졌다.
그러면서도 아이가 자면 함께 잘 생각은 안 하고 찾아보게 되는 유튜브. 실은 영상 중독이어서가 아니라 일본의 병원에서는 이렇다 할 산후조리랄 것이 없기 때문에 그야말로 '셀프 산후조리'를 해야 했기 때문인데... 누구 하나 이렇게 하라고 챙겨 주는 사람이 없었기에 가슴 셀프 마사지부터 산족 스트레칭, 요가 니드라와 숙면하는 명상법 등등 랜선 선생님들의 은혜로운 가르침으로 길고도 지루한 입원 생활을 지새울 수 있었다.
사실, 한국의 조리원 풍경을 보면 좀 위축이 된다. 콜이 온다느니, 산후 프로그램이 있다느니, 조리원 친구가 평생 친구라느니 하는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그 어느 것에도 해당되지 않는 내가, 안쓰러웠다. 미역국 하나 못 챙겨 먹는 것도 억울한데 조식으로 식빵이 나오질 않나, 저녁으로 우동이 나오질 않나. 철분 챙겨 먹으라고 주는 웨하스 한 조각과 흰 우유 200ml는 누굴 약 올리나 싶기까지 했다. (하긴... 미국은 출산 후에 코카콜라를 준다는데 이 정도면 양반인가 싶기도 하고...)
산후조리의 기억은 출산의 고통만큼이나 두고두고 회자된다. 마치 군필자들이 했던 얘기 또 하고 들었던 얘기 또 해도 절대 질리지도 않는 것처럼. 그런 기억은 입맛대로 각색되고 편집되어 더 선명하고 더 그럴듯하게 자리 잡는다. 단 7일간의 짧은 입원 기간이 내 산후조리의 전부였다. 집에 돌아와 뜨뜻한 미역국 한 그릇 챙겨 먹게 된 건 그로부터 2주가 더 지난 생후 24일째 되던 날. 그마저도 내 입맛에 맞는 미역국을 끓여줄 이가 없어 새벽 수유를 마치고 죽 쑤는 얼굴로 국자를 저어가며 셀프 미역국을 끓였던 그 동트는 아침을 절대 잊지 못할 거다.
이 자리를 빌려 가 닿을 리 없는 감사 인사를 전하고 싶다.
삐뽀삐뽀119의 하정훈 선생님.
맘똑 TV의 안소영 선생님.
다울아이 TV의 권향화 원장님.
그리고 2시간에 가까운 기나긴 신생아 수유 시간을 버틸 수 있게 해 주신 금쪽같은 내 새끼의 오은영 박사님. 그 외에도 길고 짧은 클립으로 좋은 말씀, 생각 나눠주신 모든 크리에이터 여러분들께 그저 감사의 말을 올립니다.
덕분에 바다 건너 차가운 병실에서 셀프 산후조리 잘하고 왔어요!!! 이제 저희 아이는 수유 텀과 수면 주기가가 잘 잡힌 8개월 이랍니다. 더불어 댓글로 소통했던 이름 모를 해외 육아 동지들... 힘내자우요.
https://www.youtube.com/channel/UC36Wcr0fy23W643DhG_U7HQ
https://www.youtube.com/channel/UC-FZjF-oF0Cvq699UNcG5Tg
https://www.youtube.com/channel/UC6t0ees15Lp0gyrLrAyLeJQ
https://www.youtube.com/channel/UCo9lbsLvcgE2Ft1xXvNzEL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