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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읽는인간 Sep 13. 2021

너의 우주는

이제 해 줄 수 있는 일이 그리 많지 않을지도 모르지

“いつもおばあちゃんの言いなりだ!”
맨날 할머니 맘대로 야!


발을 쿵쿵 구르며 방 문을 쾅 닫는 아이.


“어휴- 나도 이제 모르겠다. 맘대로 해라!”

고개를 가로저으며 주방으로 향하는 시어머니.


아니 이게 무슨 일이야…


퇴근하고 집에 돌아오니 집 안에 찬 바람이 쌩쌩. 초등학교 1학년인 딸아이와 만 65세의 할머니가 한 바탕 쏟아부었는지 집 안이 꽁꽁 얼어붙어있다.


살얼음 밟듯 조심조심 신발을 벗고 거실로 들어와 분위기를 살핀다.


학교에 들어가고 부쩍 말투와 행동에 변화가 큰 아이. 좋게 말하면 자아가 뚜렷해진 것이고, 나쁘게 말해 버릇없고 거칠어진 거라 할 수 있겠지만 지켜보는 어른들 입장에선 걱정이 앞서는 것이 사실이다. ‘나중에 어쩌려고’. 시어머니의 넋두리가 한 쪽 귀로 흘려 들어온다. 세상에는 안 하고 안 듣는 게 더 좋은 말도 있는 법이다. 나만 들은 게 다행이라 생각하며 안타까운 마음을 접고 조용히 아이의 방 문을 두드려 본다.


ただいま。

엄마 왔어.


아직 분함이 덜 가셨는지 씩씩 대며 좀처럼 문을 열어주지 않는 아이.


허탕 친 마음으로 이번엔 시어머니가 있는 주방으로.

저녁 준비를 하는 뒷모습을 얼른 따라 반찬을 꺼내고 테이블 세팅을 하며 이래저래 표정을 살핀다. 아무래도 이쪽도 잘 못 건드려선 안될 것 같다.


워킹맘이다 보니 어쩔 수 없이 시어머니에게 아이를 맡기게 되는 일이 잦다. 아니지. 한 지붕 아래 같이 살다 보니 맡긴다 … 는 표현보다 자연스레 ‘함께 키운다’는 말이 더 적절할 것이다. 매일 벌어지는 일상 속에서 이건 이렇게, 저건 저렇게. 집 안 분위기가 자연스럽게 아이의 성격 형성에 영향을 미치게 되는데, 쿵짝이 안 맞으면 아이 어른 할 것 없이 이렇게 마찰음이 생기기 마련이다. 오늘이 그날이네.


그래도 불행 중 다행인 것은 배고프면 어김없이 밥상머리를 끼고 한 자리에 둘러앉아 마주해야 한다는 것. 6시 30분. 우리 집의 저녁 식사 시간이다.


모른 척, 젓가락으로 밥 알을 옮기며 “이건 뭐예요~? 맛있네!” 시어머니 얼굴 한 번.

이번엔 아이 앞으로 반찬 접시를 옮기며 “맛있다, 이거. 먹어봐” 아이 얼굴 한 번.

눈치 보는 내 모습을 읽었는지 시아버지가 헛기침을 어흠~.


으으으… 누가 이 어색한 상황 좀 어떻게 해줘요.


상황 파악은 글렀고, 지금은 조용히 바람을 잠재우는 시간인 듯하다. 적당히 떠들고 적당히 침묵하는 저녁 시간을 마치고 아이와 함께 욕실로. 오늘은 단 둘이 등이라도 밀어주며 이야기를 해봐야지. 거품을 내어 구석구석 몸을 닦아낸다. 샴푸 냄새와 수증기로 얼었던 마음이 조금은 녹았을까? 따뜻한 물로 마음의 찌든 때도 같이 씻겨 내려가기를.  


“할머니랑 무슨 일이 있었어?”


“…”


“엄마한테는 말하기 어려운 이야기야?”


“…”


“하기 싫으면 안 해도 돼. 지금 못하겠으면 나중에 해도 되고.”


“…”


“…”


“… 할머니가 나한테 못할 거라고 했어.”


“할머니가 너한테 못할 거라고 했어? 그래서 속상했구나?”


“내가 나중에 밥 먹고 한다고 했는데, 자꾸 지금 하라고. 어차피 나중엔 못할 거라고 자꾸 그러잖아.”


“아~ 나중에 밥 먹고 하려고 했는데 할머니가 그 말은 안 믿어 줘서 속상했구나.”


하루에 두 페이지 씩 하고 있는 학습지를 지금 끝냈으면 하는 할머니와 나중에 하겠다는 아이의 신경전이었구나. 못난 엄마는 이제야 상황을 이해한다.


“그래서 밥 먹고 나서 했어?”


“아까 방에서 했어”


“그럼 밥 먹기 전에 한 거네? 잘했네!”


그… 그런가? 마음이 복잡해 보이는 아이. 털어놓고 보니 별거 아니었구나. 그런 생각도 들었겠지.


“그래도 할머니한테 너무 큰 소리를 내니까 속상했나 봐. 너도 속상하지?”


“…응”


“그럼 할머니한테 가서 미안하다고 사과할까?”


“나를 안 믿어 줬으니까 사과는 할머니도 해야 돼”


“그렇구나. 그럼 할머니한테 속상했다고 이야기해볼까?”


“….”


“미안하다는 말을 먼저 못 하겠으면, 아까 나 속상했어요~ 하면 되지 않을까?”


“응…”


아이는 큰 결심을 한 듯 눈 빛을 조이며 욕실을 나왔다. 머리도 채 말리지 않고 다시 계단을 오르고 방 문을 닫는다. 아까와 다른 점은 요란한 쿵쾅거림이 없다는 것.


얼마나 지났을까. 빼꼼히 방문을 열고 나온 아이의 손에는 꽃무늬 편지지가 들려있다. 말로는 못 전한 마음을 글로 전하려는 것이겠지. 엄마도 알아. 그 마음.


콩콩.

노크는 했지만 대답도 듣지 않고 할머니의 방문 틈으로 쓱 밀어 넣은 편지지.

할머니가 어떤 얼굴을 했을지는 안 봐도 비디오다.


결과는 해피 엔딩.

내일 아침 6시 30분이면 다시 밥 상을 두르고 아침밥을 먹겠지. 아침 담당은 난데 뭘 해야 하나.




오늘 하루.


아이가 어떤 일을 겪었는지. 속상했는지 분했는지 기쁘고 행복했는지. 다 따라가지 못하는 못난 엄마지만, 욕실에서 짧은 시간이나마 아이의 마음과 마주할 수 있어서 참 다행이다.


내가 모르는 아이의 세계는 이렇게 넓어져 가고 단단히 자리 잡는다. 너의 우주가 이렇게 커 가는 동안 엄마인 나는 무엇을 해줄 수 있을까. 아니 어쩌면, 이제 해 줄 수 있는 일이 그리 많지 않을지도 모르지.


아침 메뉴보다 이게 더 걱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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