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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읽는인간 Sep 12. 2021

집밥은 언제나 옳다

『당신이 옳다-정혜신』, 해냄

김이 모락 나는 밥솥.

뚜껑을 열자 안경 위로 뽀얀 김이 서린다.


후- 후-

주걱으로 눈 내린 듯한 밥 통 안을 한 바퀴 휘 저어주면 고슬고슬한 밥 알 사이사이로 반짝 윤기가 흐른다.  


외식도, 배달 음식도 땡긴다지만 그것도 하루 이틀. 암만해도 집 밥이 주는 안정감에 비할 길이 없다. 하루를 잘 살아도, 못 살아도 어김없이 찾아오는 허기짐을 채우는 10의 8할은 맨 밥에 김치일지언정 집에서 먹는 집 밥의 힘이다.


여기 집밥 같은 심리학이 있다고 한다.

밥때 되면 찾아오는 허기짐에 집 밥이 있다면, 일상적으로 일어나는 감정의 허기짐은 집밥 같은 심리학으로 치유하자고. 집밥 같은 심리학의 주재료는 ‘공감’이다.




만약 조리사 자격증을 가진 사람만 음식을 할 수 있다는 법이 있다면 우리 일상에 어떤 일이 벌어질까. 허기를 면하려면 조리사 자격증을 가진 사람의 식당 앞에서 하루 두세 번씩 긴 줄을 서야 할 것이다. 삶을 영위하기 위한 가장 기본적인 욕구인 식욕을 그렇게 해소하며 살아야 한다면 한 인간으로서 최소한의 자존감을 유지하고 살기 어렵다.   

실제로 우리는 일상에서 스스로 집밥을 만들어 허기를 해결한다. 외식도 하지만 조리사에게만 의존하지는 않는다. 조리사가 해준 고급 요리는 안 먹어도 아무 문제가 없지만 집밥을 오래 먹지 않으면 심리적으로도 불안정해진다. 그런 것이 집밥이다.   

일상에서 배고픔이 해결되지 않으면 짜증이 많아지거나 폭력적으로 변하거나 무기력해진다. 마찬가지로 삶의 바탕인 인간관계의 갈등들이 해결되지 않고 쌓이면 마음도 엇나가고 삶도 뒤틀린다. 안정적인 일상을 위해서 꼭 필요한 것이 집밥 같은 치유다. 집밥 같은 치유의 다른 이름이 적정심리학이다.

_<당신이 옳다> 정혜신, 해냄


유난 떨지 않아도 우리 모두 돌보지 못한 크고 작은 상처 한 두 개쯤은 가슴에 품고 산다. 애써 보지 않으려 하기도, 그러다 정말 새 살이 돋은 듯 까맣게 잊고 살기도 하고, 생각지도 못한 순간에 다친 데를 또 다쳐 몇 곱절 쓰라리기도 하다.


그럴 때마다 감정을 올곧이 돌보기보다 뒤돌아 서고, 덮어두기만 했던 것은 아닌지. 어른이라는 이름으로.


책은 ‘감정’이야말로 한 사람이 제대로 살기 위해 반드시 있어야 할 스펙이라고 말한다.
감정은 존재의 핵심이다.


내 감정은 오로지 ‘나’다. 그래서 감정이 소거된 존재는 나가 아니다.


감정 아닌 다른 성취나 업적 따위는 나를 설명하지 못한다. 설령 그것이 다 채워졌다 하더라도 ‘나’가 흐려지면 반드시 사람은 병들고 만다. 마치 ‘금은 넘쳐나는데 쌀은 한 줌도 없는 이상한 기근’ 같이 말이다. ‘금괴 더미 안에서 주린 배를 움켜쥐고’.


내가 나임을

너가 너임을 알아차리는

‘당신이 옳다’는 확인.


그것을 가능케 하는 것이 ‘공감’이다.


공감이란 제대로 된 관계와 소통의 다른 이름이다. 공감이란 한 존재의 개별성에 깊이 눈을 포개는 일, 상대방의 마음, 느낌의 차원까지 들어가 그를 만나고 내 마음을 포개는 일이다. 그러면서 동시에 나도 내 마음, 내 느낌을 꺼내서 그와 함께 나누고 소통하는 일이다.

_<당신이 옳다> 정혜신, 해냄




그런데 제대로 된 공감을 하기 위해선 몇 가지 알아두어야 할 점이 있다.


누구나 한결같이 공감받고 공감하며 살길 원하면서도 막상 그렇게 살기 힘든 건 공감이 무엇인지 제대로 몰라서 일 수도 있지만 공감까지 가는 길목에서 여러 허들을 만나기 때문이다. 그 허들을 잘 넘어야 마침내 공감에 도달할 수 있다.

_<당신이 옳다> 정혜신, 해냄


【일단 나부터 챙겨라】

내가 내 마음을 그대로 들여다보고 받아들일 수 있을 때, 너의 마음도 받아들일 수 있다.


누군가에게 공감자가 되려는 사람은 동시에 자신의 상처도 공감받을 수 있어야 한다. 공감하는 일의 전제는 공감받는 일이다. 자전하며 동시에 공전하는 지구처럼 공감은 다른 사람에게 집중하는 동시에 자기도 주목받고 공감받는 행위다.
타인을 공감하는 일보다 더 어려운 것은 자신을 공감하는 일이다. 자신이 공감받아야 한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이다. 타인에게 공감하는 일은 감정 노동이든 아니든 공감하는 시늉이라도 할 수 있다. 하지만 자기를 공감하는 일은 시늉할 수 없다. 남들은 몰라도 자기를 속일 방법은 없다.
자기 보호가 되지 않은 상태에서 상대가 힘들어 보인다고 개입하는 것은 수영을 하지 못하는 사람이 물에 빠진 사람을 보고 다급한 마음에 무작정 뛰어드는 것과 같다. 둘 다 불행해진다.

_<당신이 옳다> 정혜신, 해냄


【모든 감정은 옳다】

설사 누군가를 죽이고 싶을 정도의 감정을 호소하는 사람이 있다고 하더라도, 그 행동의 정당성과는 별개로 감정 자체는 옳다고 저자는 말한다.


그 말은 ‘다 부수고 나도 죽겠다’는 말이 아니다. 다 부수고 죽어버리고 싶을 만큼 지금 내가 억울하고 화가 난다는 말이다. 그 마음을 정확하게 알아듣고 받아주는 사람이 한 사람만 있으면 사람은 그 억울함에서 벗어난다. 한 사람만 있으면 된다. 사람의 감정은 항상 옳다. 사람을 죽이거나 부수고 싶어도 그 마음은 옳다. 그 마음이 옳다는 것을 누군가 알아주기만 하면 부술 마음도, 죽이고 싶은 마음도 없어진다. 비로소 분노의 지옥에서 빠져나온다.

_<당신이 옳다> 정혜신, 해냄


【감정이 옳다고 행동까지 옳은 건 아니다】

그렇다면 모든 감정이 옳다고 그 행동까지 옳다고 봐야 할까? 아니다. 둘은 '별개다'.


작든 크든 국가 대 국가는 일대일의 존재감을 갖는다. 하나의 우주로 일컬어지는 사람은 더 말할 게 없다. 국가의 국경처럼 사람과 사람 사이에도 경계가 존재한다. 모든 인간이 개별적인 존재라는 것은 나와 너 사이에 둘을 구분하는 경계가 있다는 걸 의미한다. 그런데 사람 사이의 경계는 눈에 보이지 않아서 지키는 일이 어렵다. 경계를 인지할 수 있어야만 나도 지키고 상대방을 침범하지 않을 수 있다.
내가 감당해야 할 몫이 있지만 나만 잘한다고 되지 않는다. 상대가 감당해야 할 몫도 있다. 그것까지 내가 짊어질 이유는 없다. 너도 있지만 나도 있다. 어떤 관계에서든 납득할 수 없는 심리적 갑을 관계가 일방적이고 극단적으로 계속된다면 이런 관계를 끊을 수 있는 것이 더 건강하다.
어디까지가 ‘나’이고 어디부터가 ‘너’인지 (…) 경계에 대한 인식이 있어야 공감에 대한 정확성이 높아진다.

_<당신이 옳다> 정혜신, 해냄


【상대와 똑같이 느끼는 것이 공감은 아니다】

너가 슬퍼하고 아파하는 만큼, 내 마음이 미치지 않다고 해서 공감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귀기울여 줄 수 있는 동사다.


상대방의 감정과 똑같이 느끼는 것이 공감인가. 공감을 잘한다는 건 상대와 똑같은 감정을 느끼는 상태까지 가야 하는 것인가. 아니다. 공감은 똑같이 느끼는 상태가 아니라 상대가 가지는 감정이나 느낌이 그럴 수 있겠다고 기꺼이 수용되고 이해되는 상태다. 그 상태가 되면 상대방 감정 결에 바짝 다가가서 그 느낌을 더 잘 알고 끄덕이게 된다. 상대와 같은 감정을 느끼게 되는 경우도 있지만 안 되는 경우도 있다. 상관없다.
나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지만 딸의 마음은 내 마음과는 별개다. 그러니, 그럴수록 딸에게 물어봐야 한다. 묻기도 전에, 알기도 전에 딸에게 내 생각만 쏟아 놓는 것이 사랑이나 교육일 수 없다. 그것은 그냥 심리적 폭력일 뿐이다.

_<당신이 옳다> 정혜신, 해냄


【충조평판은 공감이 아니다】

특히 주의해야 할 점. 공감의 탈을 쓴 충조평판을 경계해야 한다.


누군가의 속마음을 들을 땐 충조평판을 하지 말아야 한다. 충조평판의 다른 말은 ‘바른말’이다. 바른말은 의외로 폭력적이다. 나는 욕설에 찔려 넘어진 사람보다 바른말에 찔려 쓰러진 사람을 과장해서 한 만 배쯤은 더 많이 봤다. 사실이다.
벼랑 끝에 선 사람에게 나는 어떤 말을 해줘야 하는가. 결론적으로 해줄 말이 별로 필요치 않다. (…) 그때 필요한 건 내 말이 아니라 그의 말이다. 그의 존재, 그의 고통에 눈을 포개고 그의 말이 나올 수 있도록 내가 그에게 물어줘야 한다. 무언가 해줘야 한다는 조바심을 내려놓고 지금 그의 마음이 어떤지 물어봐야 한다.
사람은 옳은 말로 인해 도움을 받지 않는다. 자기모순을 안고 씨름하며 그것을 깨닫는 과정에서 이해와 공감을 받는 경험을 한 사람이 갖게 되는 여유와 너그러움, 공감력 그 자체가 스스로를 돕고 결국 자기를 구한다.

_<당신이 옳다> 정혜신, 해냄


【우울은 삶의 한 조각이다】

누구나, 언제나 배고프다. 하루를 잘 살아도, 못 살아도 누구나 때 되면 배가 고프고 밥을 찾는다. 작가의 말 대로 우울과 무기력은 병이 아닌 삶 그 차제다.  


추우면 소름이 돋고 무더우면 땀이 흐르지만, 그것은 잘못된 현상도 병에 걸린 것도 아니다. 땀이나 소름 때문에 불편할 순 있지만 약 먹을 일은 아니다. 내 몸의 체온을 적절하게 유지하기 위해 몸이 알아서 대응하는 중에 나타나는 현상이다.
감정도 그렇다. 슬픔이나 무기력, 외로움 같은 감정도 날씨와 비슷하다. 감정은 병의 증상이 아니라 내 삶이나 존재의 내면을 알려주는 자연스러운 반응이다. 우울은 도저히 넘을 수 없을 것 같은 높고 단단한 벽 앞에 섰을 때 인간이 느끼는 감정 반응이다. 인간의 삶은 죽음이라는 벽, 하루는 24시간뿐이라는 시간의 절대적 한계라는 벽 앞에 있다. 인간의 삶은 벽 그 자체다. 그런 점에서 모든 인간은 본질적으로 우울한 존재다. 그러므로 우울은 질병이 아닌 삶의 보편적 바탕색이다. 병이 아니라 삶 그 자체라는 말이다.
 (우울은) 흔하게 마주하는 삶의 일상적 숙제들이고 서로 도우면서 넘어서야 하는 우리 삶의 고비들이다. 누구도 혼자서는 넘기 어려운 가파른 언덕에서, 어떤 태도로 서로를 대할 것인지 마음의 준비를 하는 것이 허둥지둥 전문가를 찾는 일보다 먼저여야 우리의 삶은 편안할 수 있다.
일상적 허기처럼 갈등과 상처들이 찾아오는데 그것들을 내 손으로 해결하는 최소한의 방법을 익히지 못하면 우리의 삶은 점점 늪이 되고 지옥이 되어간다.
아기 때부터 도리도리와 걸음마를 과외 교사가 가르치고 연인과 사랑하는 법조차 학원에서만 배울 수 있다면 뭔가 잘못되어도 크게 잘못된 것이다. 이런 비상식적이고 비일상적인 외주화가 사람을 불행하게 한다.

_<당신이 옳다> 정혜신, 해냄


공감의 외주화. 남에게 내 마음을 맡기기 전에 스스로가 먼저 알아차리고 들여다볼 수 있으면 어떨까. ‘방부제를 많이 넣어서 썩지 않는 햄버거’나 눈이 휘둥그레지는 호텔 뷔페보다 멋은 좀 없을지라도... 내 입 맛에 맞고, 한 그릇 뚝딱 비우고 새 하루를 맞이할 기운이 난다면 그것 만큼 좋은 일도 없을 테니.


그리고 한 뼘의 여유가 있다면 나를 추스른 후에 주변도 돌아보자. 공감이란 다른 것이 아니라 사람과 사람이 건전한 관계 맺음 그 자체다.




나 또한 그런 경험을 했다. 스쳐 지나가는 인연이 아니라 나의 전부라 할 수 있는 관계들이 송두리째 흔들릴 때, 절대 풀리지 않을 것 같았던 실타래를 수리수리 마수리 풀어준 것은 늦은 밤 졸린 눈을 비벼가며 온 체중을 실어 공감해준 사람들의 한 마디 한 마디였다.


그릇이 작아 공감이라면 젬병인 나지만 받고 나니 알 것 같다. 속이 든든하고 뜨끈해지는 느낌을. 나도 누군가에게 그런 집 밥 한 그릇 대접하고 싶어졌다.


여담이지만 책 “당신이 옳다”는 지난 5월, 일본어로 번역되어 판매되고 있다. 띠지에는 한국에서 40만 부가 팔린 베스트셀러라는 소개와 함께.


반가운 마음에 서점에서 사 왔지만 이틀 만에 덮어버렸다.


첫날은 반가워서 읽고, 둘째 날은 아까워서 읽었는데, 셋째 날부터는 한국어로 한 번이라도 더 읽는 게 이롭지 싶어서 그만두었다. 아쉬운 번역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목만큼은 참 잘 번역되었다고 생각한다. 일본어 번역서의 제목은 #あなたは正しい (=당신’은’ 옳다)


조사 한 글자 차이지만 어순과 조사의 쓰임이 (거의) 비슷한 한국어의 ‘이’를 굳이 ‘は(은)’로 번역할 이유가 있었을까?


곰곰이 곱씹어 보니 납득이 갔다.


한국어 제목 ‘당신이 옳다’는, 다른 사람 아닌 당신이 옳다고 강조한 느낌. 주변이 어지러운 가운데 나를 먼저 챙기라는 뉘앙스가 느껴진다. 마치 매섭게 부는 바람을 양 옆에서 막아주는 이미지라면


일본어 제목 ‘당신은 옳다’에서는, 타인의 방해보다 나 조차도 내 안에서 확신을 갖지 못하고 주저하는 마음에, 너의 생각은 옳다고 어깨를 위에서 지그시 눌러 뿌리를 내리게 해 주는 느낌이다.


단 한 글자 차이지만 한국과 일본 독자들의 마음의 흔들림이 어디서 기인하는지 엿볼 수 있는 대목이었다.


“당신이 옳다.”
온 체중을 실은 그 짧은 문장만큼
누군가를 강력하게 변화시키는 말은 세상에 또 없다.

이제 나는 삶의 고통을 질병으로 간주하는 의학적 관점은 잘못됐다고 말할 수 있다. 고통스러운 사람의 속마음을 보듬고 건강한 성찰을 도울 수 있는 사람은 질병 전문가인 정신과 의사만 가능한 것이 아니다. 사람을 사람으로 보는 것이 진정한 전문가적 시선과 태도다. 그런 토대 위에서 우리 모두가 자기 스스로를 돕고 가족이나 이웃도 직접 도울 수 있는 적정한 심리학이 가능하다고 나는 믿는다.

_<당신이 옳다> 정혜신, 해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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