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읽는인간 Jun 23. 2020

6년 차 엄마의 오답노트

매일 아침 답이 없는 문제지를 받고, 자기 전에 제출한다.

12월 생인 우리 아이가 태어난 그 해 겨울은 유난히도 밤이 깊었다.


아이가 젖먹이 시절. 모든 것이 처음인 건 아이도 나도 마찬가지여서 먹이는 것 하나, 입히는 것 하나하나가 물음표 투성이었다.


'오른쪽 눈 위의 연어반은 언제 없어질까' '트름을 잘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지?' '유치가 나기 전 입 속 관리 방법은?' '녹변, 혹은 흑변을 보았을 땐?'... 꼬리에 꼬리를 물고 끊임없이 딸려 나오는 궁금증을 해결하기 위해,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희미한 수유등에 의지한 채 한 손으론 폭풍 검색을 해가며 나만의 오답 노트를 만들어 나갔었다.


2014.12 엄마의 첫 오답 노트


그로부터 1년... 2년... 해를 거듭하며 아이의 성장과 생활습관이 안정되면 나의 오답노트도 점점 줄어들겠거니 생각했는데, 이게 웬걸. 6년 차에 접어든 지금도 오답 노트 속 예제들은 줄어들기는커녕 아이의 성장 속도와 비례해 더 어렵고 난해한 문제로 난이도가 진화해 가는 중이다.


때로는 책에서, 때로는 유튜브에서, 때로는 시어머니와 주변 엄마 들의 경험담에서 우리 모녀에게 맞는 답을 찾아 고민했던 시간들. 그 흔적들이 쌓이고 쌓여 어느새 다섯 권의 노트로 남아 있다.

 

아이와 함께한 시간만큼 쌓여가는 오답 노트

2016.01 (1살 1개월)

13개월에 접어든 어느 날.
보육원에 가기 위해 모유 수유를 졸업해야 했던 그날 밤을 기억하는지. 태어나서 내내 엄마 품 속에 안겨 행복한 미소로 모유를 즐겨 왔던 너에겐 청천벽력과도 같은 밤이었겠지. 엄마도 아팠고, 너도 슬펐던 그날이 있었기에, 지금 이렇게 먹는 즐거움을 느끼고 있는 거란다.


2016.08 (1살 8개월)

뜨거운 햇살만큼이나 강렬했던 미운 두 살의 여름.
뭐든지 혼자 하겠다는 그녀의 똥고집이 기특하기도 했지만, 그만큼 조심해야 할 것도 많고, 두 배 세 배로 손이 많이 갔던 시기. 마음의 여유를 가지고 이 시기를 지나지 않았다면 스스로 일어설 수 있는 자존감과 자신감을 키울 수 있는 기회를 잃게 되었을지도 모르지.


2017.08 (2살 8개월)

한참 까불거리던 원숭이 아가씨.
오죽하면 보육원에서도 '원숭이 반'에 들어갔을까 싶을 정도로 천방지축이던 요맘때. 자기랑 닮은 구석이 많아서 인지 부쩍 좋아했던 원숭이 조지. 더운 여름에 긴자까지 전시회를 보러 갔더랬지. 그땐 그렇게 좋아하더니 지금은 어디 있는지도 모르지? 조지 인형. (엄마가 메르카리에서 처분한 지 오래다)


2019.09 (4살 9개월)

아이가 처음으로 거짓말을 했던 날.

어떻게 화를 내야 할지 몰라 깊은 한 숨을 내쉬었던 그날 밤도 어김없이 오답 노트를 펼쳤다.

엄마로서 처음 겪는 일에, 유아교육과 거짓말에 관한 정보를 수없이 찾아보며 충격과 혼돈의 며칠을 보내고 나서 얻게 된 것은 '교감'과 '공감'이었으며, 거짓말에도 여러 가지 유형이 있다는 것과, 그 또한 아이가 구사하는 언어 능력이 성장했음을 알리는 긍정적인 신호라는 것을 알게 된 것도 오답노트를 적어나가지 않았으면 몰랐을 이야기였지.


2019.09 (4살 9개월)

엄마, 할로윈이 뭐야?

엄마도 생소한 할로윈 파티가 뭔지, 알려 주고 싶어서 친구들을 초대해 할로윈 파티를 열었던 적도 있었다 그치. 20명이나 되는 친구들이 다 같이 모여 왁자지껄 떠들고 갔음에도 여전히 할로윈이 뭔지 정확히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정말 즐겁고 재밌게 보내는 날이라는 사실만큼은 기억 속에 선명히 남아 있기를!


2020.06 (5살 6개월)

#STAYHOME

2020년 상반기는 뭐니 뭐니 해도 코로나. 보육원도 휴원하고 엄마 아빠도 재택근무를 하면서 집에 있는 시간이 유난히 길었던 시기였지. 한 편으론 너와 이렇게 하루의 긴 시간을 보내는 것도 오랜만이라는 생각을 하면서, 내가 모르는 너의 모습이 이렇게 많았구나 싶어 기쁘기도 하고 아쉬움도 느꼈던 시간이었어.




쌓여가는 오답 노트를 다시 들추어 보면서
엄마란, 답이 없는 문제지를 매일 아침 받고 자기 전에 제출하는 시험을 평생 치러야 하는 거구나, 생각한다.


만점을 기대할 수도 없고 애초에 정답도 없지만, 오답 노트를 적는 시간만큼은 '내가 여기서 틀렸구나', '다음엔 이렇게 말해야지' 하고 되짚어가면서 마음을 추슬러본다.


아직도 상황에 따라 감정에 따라 속수무책으로 흔들리는 일도 많지만, 6년 차인 오늘도 네가 크는 만큼 엄마도 생각의 중심을 단단히 세워 나가야겠다고 다짐한다.


처음부터 다시 시작!

다시 시작하는 새 오답노트

그랬던 우리 집에 새 오답 노트가 생겼다.
다 끝난 줄 알았던 문제지를 다시 배부받는 느낌. 한 번 풀어 봤던 내용이니까 첫째의 오답노트를 컨닝삼아 과거의 오답들은 슬기롭게 비켜가고 새롭게 닥칠 문제들은 현명하게 대처할 수 있기를.


부족한 엄마의 총알받이를 해 준 첫째를 더 많이 사랑해 주어야겠다.


▼더 많은 이야기는 여기서

https://brunch.co.kr/magazine/hahaoya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