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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읽는인간 Aug 03. 2020

한 없이 투명에 가까운,  장강명의 『표백』

제16회 한겨레문학상 수상작

많이 보고 들었다.
작가의 이름도, 책의 제목도.


표지와 제목으로 가늠할 수 있는 책이 있는가 하면 어떤 책은 읽어야만 이해할 수 있는 책이 있다. 장강명의 표백이 그렇다.


기회가 되면 봐야지 … 하고 있다가, 애용하는 밀리의 서재에서도 읽을 수 있게 된 걸 알고는 진즉에 ‘읽는 책 목록’에 들여놓았지만, 애꿎은 표지만 멀뚱히 쳐다보다 ‘기간 만료’가 되어 몇 번이고 읽은 책으로 보내고, 다시 꺼내기를 반복하며 내내 눈에 밟혔던 책이었다. 그렇다고 어설프게 다른 사람들이 읽은 감상으로 때우고 싶진 않아서 출판사의 홍보 글이나 누군가가 올린 서평을 마주할 때면 스포일러를 안 당하려고 요리조리 피해 다니곤 했다.


그러다 이번 독서 모임에서 함께 읽을 책으로 선정되어, 이제는 빼도 박도 못하게 되었다.


읽고 싶었음에도  손이 잘 가지 않았던 이유는, 다른 게 아니라 ‘소설’이었기 때문이다.


고백하건대, 나는 소설이 어렵다.

어려워서 어렵다기보다는 자신이 없다, 가 더 정확한 표현일 거다.


소설은 막상 시작하면 술술 읽히는 진도에 비해, 표지를 넘기기까지 어마어마한 용기가 필요하다. 특히 장편 소설을 시작할 때는 내가 이 친구와 일주일 내내 붙어 다닐 수 있을 정도로 궁합이 맞는지를 깐깐히 따져보곤 하는데, 이유는 ‘몰입’해야 즐겁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줄거리를 꿰고 있지 않고서야, 첫 장을 열자마자 ‘여긴 어디’ ‘나는 누구’ 하며 두리번거리다 한참을 헤매고, 몇 번이고 다시 돌아가 등장인물들의 이름을 두 번 세 번 확인하고 나서야 겨우 내가 떨어진 세계를 확인할 수 있다.


읽는 방식도 다르다. 일례로 얼마 전 읽은 『어른의 그림책』은 일상생활의 연장선에 있었기에 언제든 틈틈이 읽고 덮을 수 있었던 반면, 『표백』은 뭉텅이 시간을 따로 확보해 두어야 했다. 빠져들면 몇 시간이고 붙잡고 싶어 질게 뻔했기 때문이다.


다행히도 책은 술술 잘 읽혔다. 타이틀 ‘표백’의 의미와 등장 인물도까지 친절하게 알려준 작가의 배려 덕에 짧고 굵게 몰입할 수 있었다.


질문을 던지는 소설, 표백

그런데 이제 나는 세상이 아주 흰색이라고 생각해. 너무너무 완벽해서 내가 더 보탤 것이 없는 흰색. 어떤 아이디어를 내더라도 이미 그보다 더 위대한 사상이 전에 나온 적이 있고, 어떤 문제점을 지적해도 그에 대한 답이 이미 있는, 그런 끝없이 흰 그림이야. 그런 세상에서 큰 틀의 획기적인 진보는 더 이상 없어. 그러니 우리도 세상의 획기적인 발전에 보탤 수 있는 게 없지. 누군가 밑그림을 그린 설계도를 따라 개선될 일은 많겠지만 그런 건 행동 대장들이 할 일이지. 참 완벽하고 시시한 세상이지 않니?

나는 그런 세상을 ‘그레이트 빅 화이트 월드’라고 불러.

『표백』 장강명 저, 한겨레출판사


불편한 진실

『표백』은 우리 사회의 불편한 진실을 가감 없이 까발린다.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이 얼마나 닫혀있으며 가망이 없는지를. 그 안에선 적응하는 자와 반항하는 자가 실은 별반 다르지 않음을. 그로 인해 모두가 길들여진 채 한 방향만을 좇는 사회 속에서 개인의 정체성이란 고작 '개성'과 '취향'이란 이름의 '소비'로 대변될 뿐이라고 말한다.


자살 선언은 위에 언급한 네 가지 삶의 방식 어느 것에도 해당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자살 선언은 완성된 사회를 ‘살아가는’ 방법이 아니라 그것을 거부하는 방법이기 때문이다.

물을 인정할 수 없는 물고기가 할 수 있는 일은 한 가지뿐이다.

『표백』 장강명 저, 한겨레출판사


그리고 묻는다.

'사는 것이 무슨 의미냐고'
'너는 어떻게 살 것이냐고'


사실, 새삼스러운 질문은 아니다.

소설 속에서는 젊은 세대의 상황과 심리를 대변하는 맛깔난 묘사와, '자살'이라는 양념을 버무려 조금 더 자극적으로 비쳤을 뿐, 삶과 죽음이라는 키워드 자체는 인류가 아직도 풀지 못한, 그러나 가장 오래된 질문이기도 하니까.


진정으로 심각한 철학적 문제는 단 하나다. 그것은 바로 자살이라는 문제다. 삶이 살 만한 가치가 있는지 없는지를 판단하는 것은 철학의 근본 문제에 답하는 것과 같다. - 알베르트 카뮈

『이기적 삶의 권유』 게리 콕스 저, 토네이도에서 재 인용


물론 재키(세연)의 논증에는 반박할 수 없는 부분이 많다. 맞장구치고 싶고 절로 고개가 끄덕여지는 부분도 있다. 화자인 '나'가 그랬듯 선언문에 동의하지 않을뿐더러, 거부감이 일기도 하지만 어떤 면에서는 선언문에 위안을 받는 듯한 '기묘한 기분'이 들기도 한다.


과연, 그런가?

다행인 점은 조금 오래전 나에겐 이 성장통이 이미 끝났다는 것이다. '그래, 이 구질구질한 세상. 죽어주는 게 답이지!'라고 마음이 쏠리지 않는 이유는 내가 '살아가는 쪽'을 택했기 때문이다.

왜 자살하지 않느냐고 카뮈는 물었다. 그냥 살기만 할 것이 아니라 사는 이유를 찾으라는 것이다. (p.49)

자살을 용기로만 하는 것이 아닌 것처럼, 삶도 용기만 있다고 해서 마냥 잘 살아지는 것이 아니다. 사는 데도 죽는 데도 다른 것이 있어야 한다. 삶의 그리고 죽음의 의미에 대한 확인이다. 그것이 없으면 삶도 죽음도 주체적 선택일 수 없다. 삶은 습관이고 죽음은 패배일 뿐이다. (p.83)

『어떻게 살 것인가』 유시민 저, 아포리아


물론 모법 답안이 손에 있어서 이렇게 말하는 것은 아니다. 살아가는 이유, 나만의 답이라는 것은 매 순간 끊임없이 묻고 또 물어야 하는 숙제이지만, 그것을 풀어 나가야 한다는 것을 거부하지 않겠다는 의미다.


작가는 물었다. 당신들의 과업이 무엇이냐고. 내심 작가 자신의 답은 어떤지 궁금해졌다. 그래서 『표백』과 관련한 인터뷰 기사와 동영상을 찾아보았지만, 어디에서도 명쾌한 답을 찾을 수는 없었다. 그 자신도 찾고 있는 것이리라.


다만, 어느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작가로서) 『표백』에선 자살을 이야기했고, 『한국이 싫어서』에선 이민을 이야기했지만 정작 저는 죽지 않고 살아있으며, 이민이 아니라 여기 한국에서 살고 있잖아요. 그런 삶도 있지만 그게 저의 답이라고 생각한 건 아니었던 거죠.




▶︎정치카페 테라스 41편 - 표백세대, 한국을 떠나다(장강명) / 팟캐스트


▶︎밀리의 서재로 보는 『표백』


덧, 독서모임 2번째 도서를 마치며

시작과 끝을 정해두지 않았던 개인적 독서에서, 목표를 정하고 나아가는 함께 읽기에 적응하는 일은 결코 쉽지만은 않다. 이번 독서는 읽는 것보다 쓰는 것에 대한 고민이 많았다. 생각이 무르익기 전에 글을 써야 하는 아쉬움을 해결하기 위해서 독서노트를 어떻게 하면 잘 쓸 수 있을까에 대해 고민했다.


그래서 내린 결론은,
틈틈이 메모하기. 나와 연결 짓기. 좋았던 부분만큼이나 불편했던 부분에 대해서도 적어보기.


애초에 거창하게 '서평'이나 '리뷰'를 적으려고 했던 것이 아니니, 한 권의 책이 나라는 인간을 통과한 이후에 어떤 변화가 있었는지를 솔직하게 적어 가도록 하자. 아울러, 시간 엄수도. (뜨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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